4. 교회 과제 2: 목회자의 변화(전 존재를 거는 신앙과 자기 비움)

박동식 교수
박동식 교수

목사는 설교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중요한 기독교적 자원이 된 설교가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이는 일부 목회자가 신학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신학을 왜곡하기도 하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설교가 흔들리니 교회가 흔들리고 교회가 흔들리니 기독교 전체가 흔들거립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신자가 세상에서 신자로 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지 싶습니다. 이러한 때에 다시금 목회자의 거룩하고 중요한 사역인 설교를 회복하고 신학을 회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존 파이퍼는 『강해의 희열』 책을 마틴 로이드 존스에게 헌정하면서 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난치지 않은 마틴 로이드 존스에게." 설교자에 대한 최고의 예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파이퍼 목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난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주장을 관철하려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치적 이슈를 포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자는 무엇보다 자신의 언어에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이죠.

어떤 목사님을 처음 만났는데 "감사합니다"는 말을 하더군요. 순간, '무엇을 내게 감사하지?' 속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른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도 "감사합니다." 하더군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언어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들이 쓰는 이 언어는 뭘까요? 거룩한 언어인가요? 진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이 상대방의 가슴에 가 닿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학교 졸업 사은회 때 졸업생들이 사전에 각 교수에게 가장 좋아하는 말씀을 받아서 멋진 캘리그라피로 말씀을 담아 액자로 만들어 주더군요. 교수들이 탄성을 질렀습니다. 제가 나눈 말씀은 로마서 14:8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한마디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다음과 비슷한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이돌 노래 가사를 패러디하면서) 교인인 듯 교인 아닌 교인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라 부르고 누군가는 이들을 '종교인'이라 부릅니다. 교회인 듯 교회 아닌 교회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모임을 '거짓 공동체'라 부릅니다. 목사인 듯 목사 아닌 목사 같은 목사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삯꾼'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침 튀겨 가며 이야기하는 "복음의 본질"로 들어가야 하고 예수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개인이든 공동체든 그 어떤 형태로든 예수의 이름으로 장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질을 추구합시다. 그것 하며 살기에도 인생이 짧지 않은가요. 요즘 "복음이면 충분"하다, "예수면 충분"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 말을 기독교 이외의 것들을 배제하자는 쪽으로 무게 중심을 기울여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본 의미는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살자는 말일 겁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비록 앞날이 밝지 않을지라도, 상황과 조건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아닌가요. 그런 삶의 고백을 우리 모두 하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단순히 교회 '다니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 설교했다면, 이제는 삶의 자리에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참 신자의 삶을 사는 것이 바른 신앙임을 목회자가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체험적 설교를 강조하는 퓨리턴 리폼드 신학교 총장인 조엘 비키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했는지를 말씀드려야 하며 동시에 성도들의 영혼과 양심에 복음을 "생생하게" 전하려 하지 않았다면 "화'가 있을 것이라 직언합니다. 더욱이 리처드 백스터가 말하는 것처럼, 영적인 의사로서 설교자가 잘못된 처방전을 내릴 때, "영혼의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사든 성도든 자기를 지우려는 마음의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자기만 들어 있으면 하나님이 계실 공간이 없게 되죠. 하나님이 계시도록 하려면 자신을 채우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지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수도원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게 하는 예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바깥세상에 사는' 누군가가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편함 근처를 서성거린다면,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또는 생각을 해주기는 하려는지 안달복달 궁금해한다면, 어떤 의미로든 공동체에서 탁월한 존재가 되려는 마음을 은근히 품고 있다면, 손님들이 이름을 들먹이며 찾아주는 환상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원장이나 다른 수도사들이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길 기대한다면, 더 흥미로운 일과 자극적인 사건들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면."

우리는 수도원에 살지는 않지만 일상에서 이런 마음들을 가지고 살지는 않는가요?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다면 우리는 그 만큼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산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 앞에 서는 목회자가 자신을 지우는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을 하나님을 향해 두어야 사람들의 시선이 없더라도 허망하지 않겠지요. 그것이 자신을 지우는 것이겠지요.

5. 교회 과제 3: 교단을 넘어 일치로 나아가는 신앙

성도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매주 교회 가서 드리던 예배와는 다른 경험을 할 때도 있을 겁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교회나 다른 교단의 예배를 경험할 때도 있을 겁니다. 예배는 시작되었는데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의 온라인 시스템이 불안정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교회를 검색해서 예배를 드립니다.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가 아니라고 예배드리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예배가 우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단을 제외한 경우, 그 교회가 어느 교단에 속한지도 모르거나 아니면 다른 교단인지 알아도 말씀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교단의 예배를 드리다 보니 그들의 예배와 자신이 속한 교회의 예배가 그렇게 다른 것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부르는 찬양도, 듣는 말씀 내용도, 예배 형식도 비슷한 것을 본다면 그런 질문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비슷한데 왜 이렇게 많은 교단이 있지?' '무슨 차이가 있지?' 그렇게 궁금한 것을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몇 가지 교리적인 부분에서만 차이가 있는데 교단이 나뉜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교단 간에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음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450여 개의 교단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떨까요?

사실 교인들은 자신들이 어느 교단에 속한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죠. 그리고 교단을 선택해서 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장로교 가정에서 자란 이들은 대부분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또 그렇게 장로교 목회자가 되죠. 타 교단에 계신 분들도 거의 비슷할 겁니다. 이렇게 태생적으로 교단이 정해지다 보니 다른 교단을 모를 뿐만 아니라 다른 교단들의 좀 다른 신학을 때로는 이상한 눈으로 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정치적 이슈로 혹은 자그마한 교리 차이로 교단을 탈퇴하고 새로운 교단을 만드는 것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는 관행을 이제는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이 속한 교회와 교단의 교리만을 진리라 여기는 기형적 신앙생활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분열의 죄과를 어떻게 감당할까요?

그런데 이제 성도들은 온라인 예배를 통해 다양한 예배를 경험하면서 교단들 사이에 별로 다를 것이 없음을 확인했으니 굳이 어느 특정 교단을 고집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배도 자신에게 맞는 예배를 찾아가겠죠. 이상하게 볼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긍정적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앞으로 성도들은 교단을 넘어서 신앙생활 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이렇게 다양한 예배를 경험하다 보면 다양성 속에서 서로를 조금씩 인정하는 흐름이 형성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교회 일치와 연합 운동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분열된 교단이 코로나 19를 통해 일치를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역사적 아이러니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분명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이제 개교회들은 교단은 다를지라도 서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서로를 인정하고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만 살겠다는 이기심은 예수님이 주신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새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모습에 제자인 줄 알 것이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요13:35) 서로 돕고 사랑하지 않으면 '제자'가 아닌 것이 되겠지요. 개교회가 속한 교단뿐만 아니라 타 교단과도 공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개교회를 넘어, 교단을 넘어 신앙생활 한다면, 이제 교회 일치 운동인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공개적인 담론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의 4가지 교회의 표식으로 고백하는 "나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믿습니다."를 정말로 진지하게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표식이 정말로 한국 교회에 적용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정말로 한국 교회는 분열이 아닌 하나를 지향하고 있는가, 정말로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를 삶으로 따르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고자 하는가, 정말로 개교회에 고립되지 않고 보편적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실제로 따랐던 사도들의 삶처럼 사도적 증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 말이죠. (계속)

박동식(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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