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렘24:1-3)
순종에는 지각이 없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처음 익은 좋은 무화과와 썩어서 못 먹는 무화과 두 광주리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먼저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가 완전히 멸망당하기 전에도 느부갓네살 왕은 수차례 유다를 침공하여 괴롭혔습니다. 여호아긴 왕이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계약을 맺고는 마음을 바꿔 반 바벨론 정책을 수행하자 응징하려고 BC 597년에 쳐들어와 왕족 고관 우수한 기술자들 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1절) 그 후에 유다 백성들이 절망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보여준 환상입니다.
그런데 환상과 그 예언에서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좋은 무화과에 해당되고 하나님이 잘 돌보아줄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4-7절) 반면에 유다 땅에 남아있는 자들은 나쁜 무화과로 모든 나라의 수치가 되어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의 형벌을 받고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 된다고 예언했습니다.(8-10절)
포로로 잡혀 간 자들이 지도층으로 고귀한 신분이라 그렇다면 차별하는 하나님이 되므로 그럴 리는 없습니다. 포로로 잡아가느냐 남겨두느냐는 순전히 느부갓네살 왕이 정하는 것입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도 왜 하나님께 나쁜 대우를 받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계속 선포했던 하나님의 메시지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는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당신의 구원과 심판 원리를 밝히려했던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대로 그 둘을 구분해 차별 대우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선 대적이 침입하면 끝까지 항거하다 전멸당하는 것이 최고의 의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국가적 위기에선 항상 강경하게 저항하자는 파가 득세를 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다르고 특별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정반대였습니다. 초지일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아직 완전히 멸망당하기 전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뜻대로 항복한다 해도 바벨론이 유다 백성 전부를 포로로 잡아갈 수는 없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특별대우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선지자가 지속적으로 전하는 예언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식했다면 언제든 그대로 따랐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당대와 가까운 미래와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포괄적으로 적용될지라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라면 듣자마자 바로 순종해야만 합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는데 유보와 지체는 있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키려 왔을 때라도 사실은 늦은 것이 아닙니다. 그 때라도 완전히 항복하면 아무리 포악한 느부갓네살이라도 바벨론 군대가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기에 아무래도 더 포용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도구로 사용하신 이방인들의 안위도 배려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두 가지 전제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역은 이처럼 때로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모순 상충 아니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누구의 뜻이 옳고 선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생각으로 이상하다 싶어도 그분의 말씀이라면 듣자마자 곧바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그분은 신실하십니다. 그러니까 언제 들어도 바로 그 때에 순종해야 하고 그러면 그분이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결실 맺어주십니다. 하나님께 회개 순종함에는 지체 유보도 없지만 지각도 없습니다.
유다에 남은 자가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보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더 사악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었는지 여부로만 구원과 심판으로 나눕니다. 당신만이 유일하고 절대적 선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분께 순종하지 않으면 그분의 벌을 받기 전에 그 자체로 이미 그분의 온전한 선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 독재자가 자기 말 듣지 않는 백성에게 제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분의 심판에는 두 가지 절대적 전제가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모든 인간이, 신자를 포함해 스스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언제든 죽여도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이며 그런 상태는 죽을 때까지 지속됩니다. 그렇게 가난한 영적 실상은 천국에 가서야 종식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선 더더욱 하나님께 항상 순종해야만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아무나 자기 멋대로 심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언제라도 순종한 자를 당신께서 변화 성장시켜서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도 그러지 않은 사람과 똑 같은 죄인임에도 순종한 자만이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그분께 겸손히 엎드리면 거룩한 생명으로 이끌 계획을 다 마련해 놓았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겪을 상황이 어떠합니까? 화려, 사치, 풍요, 쾌락이 범람하고 우상숭배가 만연하는 사악하고 음란한 모습을 일상적으로 볼 것입니다. 결국 그들 앞에 하나님은 생명과 죽음의 두 가지 길을 놓아둔 것입니다. 현실의 겉모습에 빠져서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것이냐, 아니면 그것들이 아무리 화려해도 헛되고 헛된 것으로 거짓의 아비 사탄의 농간이요 미혹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올 것이냐입니다. 악을 겪어야 선을 알 수 있는데 최고의 악을 보면 최고의 선으로 전향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함 이전에 인간의 책임
그런데 이 원리는 남아있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바벨론이 점령했기에 일본이 한국을 강점했을 때처럼 바벨론에서 군대, 관리, 부자 장사치들이 이주해 와서 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합니다. 또 그들은 본토에서 행했던 풍습대로 사치, 향락, 우상숭배의 죄악상을 연출하게 됩니다.
유다 땅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생명과 죽음의 길을 당신의 백성 앞에 열어놓습니다. 그 둘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행할 것인가는 즉, 순종 혹은 거역은 이스라엘의 결단에 달렸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 둘로 나눈 것처럼 설명되어 있어도 실은 인간 이스라엘에게 그 중 하나를 선택하고 실천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느 쪽에 회개의 가능성이 더 높겠습니까? 아무래도 포로로 잡혀간 자들입니다. 유다에 남은 자들은 익숙한 풍토 기후 관습아래 이전 직업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활환경이나 이웃 사람에도 변화가 없습니다. 단순히 지배계층만 바뀐 것뿐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의식이 깨어있고 나라를 생각하는 자들은 해외로 출국 망명하여서 실력을 쌓거나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도 그렇게 잡혀온 것부터가 하나님의 형벌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두고 온 조국을 더 생각하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바벨론에 도착하자마자, 아니 포로로 잡혀가는 순간부터 진정으로 회개할 것입니다. 실제로 바벨론에서 돌아오자 영적부흥운동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포로들을 돌보아 돌아오게 하고 그들이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신 뜻입니다.(4-7절)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이성과 모순 상충을 보일 때에 정확히 분별하여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신자라면 항상 그래야 하지만 특별히 죽음과 생명의 두 길로 나뉘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는 것처럼 사방이 막히는 고난이 겹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잘못 분별하면 자칫 되돌릴 수 없는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 아주 화려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풍요 같을 때도 있는데 마찬가지로 혹시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탄이 배후에 없는지 더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예레미야가 그 답입니다. 그는 수십 년 간 동일한 메시지만 전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끊임없이 기도한 결과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항복하라는 뜻이 이해도 안 되고 마음에 차지 않아서 대들고 계속 씨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그 말씀밖에 안 주시니까 그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기도하고 말씀에 정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인 매뉴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영적인 원리와 이 세상과 신자를 다스리는 기준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성령에 자신의 영을 오픈하면 그분의 미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어느 길로 가선 안 된다는 것은 반드시 알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그분의 뜻을 알고 순종하려면 신자도 신실해지는 길 말고는 없다는 뜻입니다.
2018/10/13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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