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목사
대림다문화선교센터 대표 이선규 목사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적어도 몇 번은 이사를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서울의 인구 가운데 3분의 2가 외지인이 이사 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이사와 관계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연말이 다가오면 국내외 항공사들도 할인 행사를 계획하고 따뜻한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세요.”라는 광고 문자가 올라옵니다.

성경에도 이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개명 전의 이름)에게 이사를 명령하십니다.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는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사를 명하신 것은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창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축복을 받았고, 창대하게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노비를 318명이나 거느리는 자가 되었고(창 14:14), 이삭을 바침으로 여호와 이레의 축복까지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생명의 땅을 예비하시고 그곳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는 단지 그 자신만 복을 누리는 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복을 나누는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거부가 되고, 함께하던 사람들은 용사가 되었고, 아브라함은 점점 나아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부르셨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품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 우리를 아시고 어머니의 모태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으시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닮은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자신을 인자라 하셨습니다.

원어로 하면 ‘벤 아담’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의 아들,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부르며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집을 떠나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7:1-4에 보면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은 단번에 떠날 수 없어 아버지 데라를 하란까지 데리고 갔습니다(창 11:31-32). 그런데 하란에서 데라가 죽습니다. 하란에서 데라를 떼어낸 것입니다.

데라는 ‘늦어짐’을 뜻합니다.

데라 때문에 속도가 늦어졌습니다. 축복이 늦어집니다.

우르는 세상에서 하던 풍습, 버릇, 습관과 같습니다. 이것들을 버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떼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품에 들어오려 할 때, 신앙을 늦어지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들입니다. 돈, 사업, 지식, 세상 것 등등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두 번째 명령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도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믿지 못해 조카 롯을 데리고 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겉으로는 버린 것 같은데, 실제로는 버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조카 롯을 데리고 갔을까요?

사실 그때까지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롯을 데리고 갔지만, 이것이 후회하는 큰 사건이 됩니다.

하나님은 롯이 떨어지지 않자 아브라함의 종과 롯의 종이 다투도록 하십니다.

이 일로 아브라함은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버리고 떠나라고 하셨는데 롯을 데려온 것을 후회합니다.

“이제라도 떠나라.” 그제서야 롯을 정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라고 하셨습니다. 막연합니다. 우리는 확실한 것을 보여야 움직입니다.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할 때 움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릅니다. 하나님 편에서 결정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많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입니다. 아는 것이 아니라 믿고 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부르셨는가입니다.

믿음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인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강한 저항이 있습니다.

순순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는 모습은 인류의 모습이며,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버리고 또 버팁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완강한 저항보다 더 강력한 은혜를 쏟아 부으셔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44에 주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고,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택한 백성을 이끌어 내십니다.

우리는 거대한 구원 안으로 들어오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구원의 길로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이끌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오늘 여기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주님께서 매우 싫어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행위로는 흠잡을 데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들을 싫어하셨을까요?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구원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반응한다면 내 인생도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 들어섰다면 그 믿음은 내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고,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가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의 통로가 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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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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