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코로나19와 한국 교회 과제

1. 교회와 세상

박동식 교수
박동식 교수

교회의 과제를 제시하려면 교회로 바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놓여 있는 세상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공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코로나19도 세상 전체에 퍼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신학이 공공의 영역을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공적 신학은 여기서 가능할 것이며 그 내용도 다층적어야 합니다.

공적 공간에서 신학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신앙과 역사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말씀을 잘 압니다. 다른 말씀은 암송 못 해도 이 말씀만큼은 암송하지요.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인가요? 단순히 과학을 배척하기 위한 수준으로 이 말씀을 사용하나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를 착취할 수 없고, 어느 인종도 어느 인종을 차별할 수 없으며, 만인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그 어떤 이단보다도 더한 이단들이지요. 이렇게 좀 거칠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이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본래적 의미를 놓치고, 그동안 화석화된 교리를 지키기 위해 이 놀라운 기독교의 고백을 간과하는 것을 그냥 묵인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창조신앙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 창조신앙이 제대로 정립이 되면 역사의식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지요.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섭리해 가시는 역사이기에 그렇습니다. 역사의식을 지닌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인식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거짓 뉴스는 일단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팩트체크도 하지 않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팩트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는 바를 바꾸지 않는 것은 자신이 지키는 이념에 따라 자신이 바라는 것을 역사적 사실 위에 두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철학자 포이에르바흐가 말하는 "자기의식의 반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는 "제자"는 "역사를 만드는 자"라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자이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인데 역사에는 관심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이 어찌 참된 제자이겠습니까? 교회가 역사와 세상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교회도 정비하고, 세상에 바른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스스로 세상과 만나기 위해 다양한 컨텐츠를 계발해야 합니다. 거룩의 언어는 세상 언어가 없는 곳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 언어 속에서 거룩의 언어를 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과 만나야 합니다. 만나는 방식도 다양해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 후,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자신들의 마음만을 정결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느12:30)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몸을 정결하게 하며 성문과 성벽도 정결하게 한 것을 보면, 우리가 정결하게 가꾸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몸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농담 한 번 하죠. 그동안 "속"이 썩었습니다. "성(sacred)"이 "속(secular)"을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성"이 "성"을 떠나 "속"으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성과 속을 이분법적으로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 나라와 이 땅, 교회와 교회 밖, 주일과 평일을 이분법적 도식으로 나눈 것이 사실이죠. 그리고 하나님 나라, 교회, 주일을 성스럽게 여기고, 이 땅과 교회 밖과 평일을 속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이러한 성과 속의 분리선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코로나19가 어쩌면 우리에게 "속"에서 "성"으로 살 것을 강제적으로 요구하며,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돌봐야 할 교회

영화 <내부자들>에서 지방 출신의 검사가 어떤 이유로 정직됩니다. 살려 달라고 부장 검사에게 호소할 때, 부장 검사가 그에게 농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지 그랬어. 아니면 잘 좀 태어나든가." 농담이지만 그 말에는 우리 사회가 묵인하고 있는 진실 하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고대 노예제나 중세 봉건제 같은 신분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의 태생을 고려해야 한다면, 그건 비참한 사회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하이웨이에서 나와 신호를 기다리는데 홈리스 한 분이 모자를 벗고는 갑자기 도로로 뛰어듭니다. 가만히 보니 누군가가 창문을 열고 건네주는 돈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그 돈이 너무나도 반가웠고 갈급했기에, 창문 열고 돈을 내미는 손짓에 모자를 벗고 눈동자를 크게 하고는 뛰어간 것입니다. 짐작하건대 그의 눈은 언제나 사람을 향해 있을 것이며 그중에서 돈 주는 이들을 찾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돈은 가진 자에게서 가지지 못한 자에게로 흐르고, 돈을 갈망하는 시선은 그 돈을 받는 자에게서 주는 자에게로 흐르지 싶습니다. 돈을 매개로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시선이 마주칩니다. 가난의 문제가 있는 한 늘 언제나 돈을 갈망하는 홈리스의 처연한 시선은 멈추지 않겠죠.

언컨텍트 시대에 가난의 문제는 더욱더 심해질 것 같습니다. 당장 어머 어마한 수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니 가난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을 기울여야 합니다. 칼 폴라니 연구소의 홍기빈 소장이 프로그램에 나와서 코로나 이후를 언급하며 몇 가지 삶의 원칙을 제시하더군요. 첫째, 사회적 방역 시스템을 구축하자고 합니다. 개인 차원의 건강 관리가 아니라 사회적 건강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둘째는 경제활동 조직인데 시장 경제는 아니라고 합니다. 국가가 고용을 보장하는 제도로 가자고 제안합니다. 여기에 용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셋째, '무한한 욕망을 무한히 긍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삶에 자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홍 소장은 "business as usual"(원래 대로의 일상?)로 돌아갈 수 없으니 우리의 삶의 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도 사회도 자연도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세 원칙 중 두 번째인 국가가 고용을 보장하자는 주장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중요한 제안이라 생각합니다.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적으로 국가가 시민들에게 일정 금액의 재정을 지원하는 것도 아마 그런 방책 중 하나일 거라 여겨집니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태생을 고려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듯, 개인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그냥 두는 것도 무자비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가난의 문제가 더욱더 심각해질 코로나19 이후 개인이 할 일이 있고, 사회가 할 일이 있을 테지만 교회가 할 일이 많을 겁니다. 누구보다 가난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교회 아니겠습니까?

3. 교회 과제 1: 교회에 대한 재조명(건물 신학 아닌 공유 신학)

코로나19 이전에는 교회/성전/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고민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예배는 교회에서 드리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교회에 가지 못하니 예배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와 성전과 예배당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여기서는 구분 없이 사용하고자 합니다). 물론 그중에는 '교회는 건물이다, 아니다, 교회는 우리 자신이다'라는 다소 한 측면만을 강조하는 소모적 논쟁도 있었고요. 신학자 한스 큉은 교회를 "객관적 실체'로 보는 것은 "실체론적인 그릇된 교회관"이라 하여, "인간 없이 교회란 없다"고 했지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에 보이는 교회를 외면할 수도 없지요. 그러니 두 가지 측면 모두를 동시에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도 교회의 가시적 형태와 비가시적 형태를 설명합니다. "교회는 예배하고 서로를 위해 활동하는 공동체로서 가시적이다. 교회는 종말론적 실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비가시적이다." 가시적 교회를 건물로 보고, 비가시적 교회를, 바울이 말한 것처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고전3:16)이라 했으니, 우리 자신으로 본다면, 교회든 성전이든 예배당이든 용어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그렇게 의미가 없다 여겨집니다. 다만 그 의미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예배에 대한 재해석은 교회 건물에 대한 재해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이제는 교회 건물에서 예배드리지 않는다고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기존 교회와 성도들은 교회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지 않고 신앙 생활하는 이들을 '가나안 성도'라 하여 이상한 시선으로 봐온 것이 사실이죠. 어떻게 신앙생활을 교회에 오지 않고 할 수 있냐고 말이죠. 일정 부분 타당한 지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그렇게 말했던 분들이 어쩔 수 없이 가나안 성도의 삶을 직접 경험해 보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는 함부로 가나안 성도들을 비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는 자신이 하고 있거나 연관된 것은 비판하지 않는 인간 본성 때문이겠죠. 이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예배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동안 교회는 "건물"에 치중한 것이 사실이죠.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려야 예배드린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니 예배드릴 공간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신학도 이에 따라 "건물 신학"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이런 현상을 복음과 교회 건물을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복음은 '가라'고 하지만 교회 건물은 '머물라'고 한다. 복음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라' 말하지만 우리의 교회는 '잃어버린 자들이 교회를 찾게 하라'고 말한다." 이러한 통찰은 코로나19 이전이었으면 그저 교회 현실을 모르는 학자의 추상적 언어로만 취급되었을 것이며 그렇게 설득력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흩어져보니 이 구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해지네요. 그런데 가라면 어디로 가나요? 세상 아닌가요?

성전을 살리기 위해서 교회가 건물의 경계선을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다고 교회가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 밖으로 나가 자신이 가는 곳에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라고만 하지 말고 목회자들이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홍익대학교 건축과 유현준 교수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조명하면서 '건물과 권력'의 관계를 설명한 것에 일부 수긍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사무실에서 권력이 형성되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권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죠. 종교 권력도 비슷하다 합니다. 교회에 모여야 권력이 생긴다는 거죠. 예배 시간에 긴 의자에 앉혀서 (목회자가 있는) 한 방향을 바라보면 그 안에 서 있는 사람이 권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공간을 통해 권력을 창출한 쪽은 그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는 거에요. 그러니 권력을 쥐고 있는 쪽은 변화에 저항할 것'이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권력이 건물에서 나온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건물 즉 예배당만을 고집하면 결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장 그런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조금씩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회는 기존 성도들의 30%, 어떤 교회는 50%, 또 어떤 교회는 90% 정도가 예배당에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동 헌금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헌금이 줄면 목회자 사례비도 줄어들 것이고 선교비도 줄겠지요. 그러면 목회자가 어쩔 수 없이 이중직을 가져야 하거나 아니면 아내들이 직장을 다녀야 할 것입니다.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팬데믹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여러 번 올 수 있다 하는데 그렇다면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에는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정말로 교회 건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건물이나 공간을 가지지 못한 교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싶습니다. 코로나19 기간 동안 교회가 이사 간다는 글을 종종 읽습니다. 이 코로나 기간에 예측되었던 일이지 싶습니다. 가슴이 아프네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자체 건물을 가지지 못한 교회들, 즉 새 들어 사는 교회는 렌트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우울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대안 중 하나는 예배당 공유일 겁니다. 건물을 가진 교회가 건물 없는 교회에 오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곳 LA 기독교 방송국 중 하나인 CTS에서 개척교회 온라인 예배를 지원한다는 반갑고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체 건물이 없는 교회는 인력이 부족한 것이 당연하죠. 이 둘은 맞물려 있습니다. 예배당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사람이 없으니 그런 기술적 인력이 부족한 것은 당연하겠죠. 그러다 보니 코로나19로 인해 미자립 교회가 예배 영상을 준비하는 데 상당한 기술적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방송국이 그런 어려움이 있는 교회에 장소를 제공해 주고 영상을 녹화해 주더군요. 이런 실제적 협력이 필요합니다.

한국기독공보 6월 11일 자 기사에 따르면, 한국 통합 측 서울북노회가 2020년 6월 9일에 열린 제74차 정기노회에서 '예배처소공유제(공유예배당제도)'를 총회에 헌의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예배처소공유제는 이미 미국에서는 시행되고 있는 "건물이 있는 교회와 예배당 사용 시간을 조정하거나 혹은 몇몇 작은 교회가 연합해 한 건물을 임대하고 예배당을 공유하는 제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건의 사항이 올라온 것은 그만큼 요구하는 교회가 많기 때문일 겁니다. 코로나19 이후 어려운 재정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제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지 싶습니다. (계속)

박동식(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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