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타락이 심각하던 시절, 하나님의 준비였던 사무엘이 소명(vocation)을 받는다. 제사장(priest)과 선지자(prophet)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Judge)로 소명 받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사(士師) 시대와 왕정(王政) 시대를 연결하는 과도기적 시대의 주역이 된 은혜의 사람, 사무엘을 보며 우리의 소명을 생각하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다.
제사장, 축복의 통로
당시 제사장 엘리는 비록 아들들의 잘못과 자녀교육 실패에 대한 책망을 받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제사장 역할을 잘 수행한 측면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은 기도하던 한나를 축복한 것(1:17), 그의 축복대로 한나는 사무엘을 얻는 큰 은혜를 입었다. 그뿐이 아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바치기로 서원한 한나를 또 축복해서 한나로 하여금 사무엘을 대신한 세 아들과 두 딸, 즉 5남매를 더 낳는 축복을 누리게 한다(2:20-21). 하나님이 은혜를 엘리를 통해 쏟아부어 주신 것이다.
그렇다. 제사장은 축복의 통로다. 가끔 제사장의 능력이나 인격이 논란거리가 될 때가 있기도 하지만 제사장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이자 통로이다. 물론 깨끗하면 잘 나오고, 녹이 슬면 쫄쫄 나오고, 오물이 많으면 아예 막혀버릴 수도 있는 수도관과 같은 존재인 것은 맞는다.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은 아예 막혀버린 케이스였다. 그래서 능력은 상수원으로부터 공급되는 물에 있다고 해도 수도관의 역할 역시 중요하다.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종교 이미지 조사 결과를 보면 불교는 ‘온화한, 절제하는, 따뜻한, 윤리적인, 착한, 신중한’ 이미지이고, 천주교는 ‘온화한, 따뜻한, 윤리적인, 깨끗한, 가족적인, 착한’ 이미지인 반면 기독교는 ‘거리를 두고 싶은, 이중적, 사기꾼 같은, 이기적인, 배타적인, 부패한’ 이미지라고 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기독교의 이미지가 목회자의 이미지라면 축복의 통로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어떤가? 성경은 성도들도 다 제사장이라고 했지만(벧전 2:9) 성도들에게는 이 ‘만인제사장설’이라 일컫는 제사장 의식조차 없다. 특히 한국교회 성도들은 지나칠 정도로 목회자 의존적인 경향을 보인다. 그 결과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예배가 길어지면서 축복의 통로는커녕 아예 예배에 실패하는 성도가 늘어났던 것이다. 예배 시작 직전 예배를 위해 스탠바이(stand by)한 성도 숫자를 확인하면서 실망했던 때가 많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교회와 거리두기’ ‘예배와 거리두기’가 되고 말았던 것, 아직도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는 성도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가?
그래서 코로나 당시 끝까지 현장 예배를 고수한 교회들도 있었다. 그 교회들은 “우리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너무 이기적인 모습으로 보여지면서 자녀 세대들과 주변의 인식이 더 나빠졌던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현장 예배냐 온라인 예배냐가 아니다. 지난 정권의 탄핵을 전후한 보수와 진보의 초대형 집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광장으로 나가든 골방으로 가든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는 성도들의 소명 의식이 훨씬 더 중요했는데, 이건 별로 거론되지도 않았다.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든 성도든 삶의 현장에서 축복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야 실추된 교회의 이미지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통 터치
엘리에 이은 사무엘의 바통 터치, 이제 엘리 시대는 저물고 사무엘의 시대가 밝아온다. 물론 퇴장하는 엘리 제사장을 보면 씁쓸하다. 지도자는 퇴장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운동경기를 관전하던 관중들이 “아무개 빼”라고 소리치며 기대하는 선수를 투입하라고 특정 선수 이름을 연호하는 것을 보는데, 지도자는 최소한 “왜 물러나지 않나?” 하는 소리를 듣지는 말아야 한다. 문제는 사회 지도자들의 퇴장이 박수보다는 비난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는데, 교회 지도자들의 퇴장 때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운 퇴장도 많았다. 하지만 세습 논란이 부끄럽고, 때를 놓치거나 욕심 때문에 잡음을 많이 남긴 아름답지 못한 퇴장도 너무 많았다. 자화자찬은 또 얼마나 많은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더 부끄럽다.
엘리의 퇴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내려오질 않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제사장이나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끝, 그건 하나님의 퇴장 명령과 다름없다. 이어서 엘리가 늙은 것도 원인이 되었다(2절). 요즘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신체 나이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이 이기는 장사 없다”는 말도 맞지 않은가? 엘리는 나이도 많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엘리에게는 욕심도 있었다. 아들들이 제물에 대한 욕심으로 여호와의 제사를 망치고 음행할 때도 핏줄 때문에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내치지 않았다(13절). 욕심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와 대형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교회만 있다는 지적도 있다. 가톨릭이 지역에 따라 교회를 정해주기 때문에 대형교회가 없는 것과 달리 개신교는 대형교회들이 주변을 싹쓸이한다. 이것도 은혜가 아니라 욕심 아닐까?
결국 엘리의 퇴장은 아름답지 못했다. 두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자 더 이상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는 가문이 되었고, 엘리의 마지막도 비참했다.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4:18). 퇴장이 너무 비참했다.
모두에도 언급했지만 잘한 측면도 있었다. 제일 잘한 것은 사무엘을 잘 키운 것이었다. 제사장 지파도 아닌 에브라임(Ephraim) 지파의 사무엘, 그런데도 제사장처럼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성전에서 자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도 가르쳤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날도 성소에서 자다가 꿈결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부른 줄 알고 달려오지만 돌려보냈다. 그리고 같은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자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8-9절). 다음 세대 준비,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엘리도 멘토 역할을 잘한 것, 인정할 건 해야 한다.
문제는 바통 터치해야 할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는 뭔가에 중독된 세대 같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중독, 게임 중독, 약물 중독, 알코올 중독, 니코틴 중독, 일 중독, 성형 중독… 오죽하면 어느 신문에 ‘게임, 도박, 알코올, 약물, 4대 중독에 빠진 대한민국’이라는 기사가 실렸을까? 젊은 세대만의 문제도 아니라는 뜻이다. 중독자를 정확하게 통계 내기는 쉽지 않지만 지난 2021년 1월말 극동방송 특별 기획 다큐멘터리 ‘중독’ 제작발표회 & 세미나 내용에 따르면 중독자는 약 80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피해받는 가족들은 약 2.5배인 2천만 명, 거의 3천만 명이 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두렵다. 4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이 정도면 전 국민이 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세대 간의 갈등도 해소해야 한다. 엘리가 바통 터치에 성공한 것처럼 우리도 세대교체에 성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명심하라. 세대교체가 잘되어야 미래가 있다.
말씀의 사람
사무엘이 소명 받을 때의 나이는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우리에게는 어린 아이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의 그림은 익숙하다. 70~80년대 버스 안 백미러 옆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까지 넣어 달고 다니던 그림, 조수아 레이놀즈(Sir Joshua Reynolds)라는 화가가 1776년에 그린 『어린 사무엘』(The Infant Samuel)이라는 작품이다. 하얀 잠옷을 입고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사무엘의 모습은 참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하나님은 그 어린 사무엘에게 소명을 주셨다. 사도 바울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1:15)라고 했는데, 사무엘의 소명은 어머니 한나가 눈물로 기도하면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출생할 때부터 갈 길이 정해졌던 사무엘, 잠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엘리에게 달려가자 엘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9절)라고 대답하도록 코치했다. 소명이 말씀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엘리 집안에 임할 심판을 예언하게 하셨다(11-14절). 그때 사무엘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선지자가 히브리어로 ‘나비’(nabi), ‘말하는 자’라는 뜻인데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18절),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된다. 그를 부르시는 장면을 봐도 그렇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21절), 하나님은 사무엘을 말씀으로 소명하셨던 것이다.
기도로 얻은 사람, 성전에서 자란 사람, 이제는 말씀의 사람으로 등장한다. 나침반(compass)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듯 말씀은 항상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말씀 중심이 우리의 특색이자 자랑이 되어야 한다. 명상이나 의식이 아니라 말씀, 사무엘처럼 말씀 중심의 사람이 되고, 말씀 중심의 교회가 되기 바란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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