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비밀 하나 알려줄까? 당신은 자신을 알기도 전에 이미 구원받았다’(Want to know a secret? You’re saved before you know it)를 최근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비밀을 하나 주고 싶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사실 당신은 자신이 알기도 전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즉, ‘내가 스스로 결단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이다. 존 칩먼(John Chipman) 목사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의 글 “구원의 순서에서 무엇이 먼저인가: 믿음인가, 중생인가?”가 그 증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중생에 앞선다. 항상. 모든 사람에게.” 많은 이들은 그 반대 주장을 이단적이거나 비성경적이라고 여긴다. 그럼에도 필자는 잠시 시간을 내어, 믿음보다 중생이 먼저라는 입장을 변호해 보려 한다.

필자 역시 초기 신앙 생활에서는 그 반대를 믿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살리시고 능력을 주시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선택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진리만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드물다.

문제의 핵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R. C. 스프로울도 필자와 같았다. 한 짧은 글에서 그는 신학교 시절 교수에게서 “중생이 믿음보다 먼저이다”라는 가르침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스프로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내게 충격이었다. 나는 ‘거듭남을 이루는 인간의 핵심적 역할은 믿음이다’라고 생각했다. 즉, 우리가 먼저 믿어야 거듭난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금방 이 주제를 다시 배웠고, 결국 중생이 믿음보다 먼저라는 견해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가 되었다. 그를 변화시킨 결정적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무엇보다도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 즉 하나님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상태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 6:65). 이는 우리가 스스로는 하나님을 선택할 도덕적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마 13:11)고 말씀하심으로써, 믿음이 부여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셨다.

또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리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께 복종할 수 없다”(롬 8:6–7).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즉,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 복종할 수 없고, 영적인 일들이 어리석게만 보이며, 이해조차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이 스스로 믿음을 일으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단 말인가?

초대 교부들과 종교개혁가들의 일관된 고백

어거스틴은 이 난제를 이렇게 요약했다: “주여, 주께서 명하시는 것을 주시고,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하소서.”

즉,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을 행할 능력조차 하나님께서 먼저 주셔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 때문에 그는 당시 많은 반발을 샀다. 오늘날 ‘중생이 믿음보다 먼저’라고 말하는 우리가 받는 시선과 동일하다.

어거스틴과 그 입장을 따르는 이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지만, 영적 자유는 없다고 믿는다. 즉, 우리는 선택 능력은 있으나 하나님을 향해 선택할 능력, 즉 믿음을 행사할 능력이 처음에는 없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자유의지는 자유가 아니라, 악의 포로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중생을 이렇게 비유했다: “거듭남은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소경의 눈이 밝아지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것… 죽은 자를 살리는 것… 곧 새로운 창조이다.”

‘중생’(παλιγγενεσία, palingenesia)이라는 헬라어 자체가 “새로운 창조,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아옴”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중생의 열매이지 원인일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선택하는가? 성경의 증거들이 이렇게 인간의 영적 무능력을 강조한다면, 어떻게 어떤 사람은 스스로 그 죽음에서 벗어나 믿음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럼 결국 우리의 구원 중 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의 공로가 되는 것 아닌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또 요한복음 1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이처럼 말씀은 명확하다. 믿음과 새 생명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주어지는 것이다. 바울도 “믿음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라고 말한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3),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루터와 에드워즈가 이 주제를 다룬 저서들을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여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결론적으로, 중생은 반드시 믿음에 앞선다

필자는 존 칩먼 목사의 한 문장에 대해 동의한다. “…이 문제를 잘못 이해하면, 우리는 성경적 하나님을 잃고 복음을 타락시킨다.” 그 말은 정확하다. 그러므로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이 먼저 당신을 선택하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요 15:16).

둘째,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방식을 인간의 논리로 이해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을 줄로 생각하였다”(시 50:21).

이 모든 것을 기도하며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믿음보다 중생이 먼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크리스천포스트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