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1997년 s8US 뉴스 & 월드 리포트’에서 재미있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유명 인사들 중에 과연 “누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었다. 결과는 농구의 황제 마이클 조던이 4위, 토크쇼 진행인 오프라 윈프리가 3위, 테레사 수녀가 79퍼센트로 2등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많은 87퍼센트를 받아 테레사 수녀를 앞지른 인물이 하나 있었다. 누구일까? 바로 ‘질문받은 자기 자신’이었다고 한다.

평균적인 미국인들은 자신이 테레사 수녀보다 천국에 갈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한국교회 성도 중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는 30%밖에 되질 않는다는 통계가 나왔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아마도 현재는 그보다 훨씬 더 떨어지는 통계가 나올 것이 분명하다. 어째서 미국 성도들과 한국 성도들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그것은 미국인과 한국인들의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서 천만 원을 선물로 주겠다고 하면 대부분은 “땡큐!”(Thank you!)라고 하면서 받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의심을 하면서 “참말로요?”(Really?)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이긴 해도 대부분의 한국인은 천만 원을 받을 만한 대가를 자신이 지불한 적이 없기에 거저 받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이해함에 있어서 서양인들에 비해 동양인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려운 이유다. ‘체면문화’(Honor-shame culture)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심한 나라가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보다 체면문화가 유독 심한 곳이다. 서양사회는 자신이 우선시되는 개인주의이고, 한국사회는 나보다 남을 의식하는 공동체의 체면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는 서양 사람의 조상이 수렵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신이 편리한 대로 실리적인 역할이 강조된데 비해, 우리의 조상은 농경문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공동체의식이 많아 협동생활과 위계질서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가 무척 관심거리다. 그래서 한국사회엔 체면문화가 발달해 어디를 가건 남의 이목을 의식하곤 한다. 천만 원을 무료로 받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지만, 그걸 받을 만한 대가를 지불한 적이 없기에 거저 받기가 민망하고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값없이 받는 복음을 이해함에도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구원받은 이라면 그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정상이다. 물론 그렇다고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구원 못 받았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 구원받은 성도이긴 하지만, 지금 그에 걸맞는 삶을 잘 못 살고 있기에 천국 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가 부끄럽고 죄스러워서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구원이 우리의 성취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준다.

요일 5:13은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여기서 “알게 하려 함이라”는 헬라어 ‘εἰδῶτε’로, ‘확실히 인식된 지식’, 즉 ‘더는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확정된 사실’을 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 문제에 대해 떨며 불안해하길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기뻐하고 확신 가운데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주저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구원의 근거를 자신에게서 찾으려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앙 상태’나 그에 대한 ‘자신의 느낌’으로 구원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엡 2:8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선물’은 ‘받는 자의 공로’가 아니라 ‘주는 자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전쟁 중 어떤 젊은 병사가 두려움 때문에 탈영했다가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며칠 밤낮을 걸어 링컨 대통령을 찾아갔다. 마침내 대통령 앞에 선 그녀는 눈물로 간청했다. “대통령님,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저는 그가 살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당신의 자비에 호소할 뿐입니다.”

링컨은 조용히 말했다. “부인, 자격을 따진다면 누구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비는 자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면장을 써 주었다. 아들은 사면장을 받는 순간까지도 떨며 말했다. “정말 맞습니까? 정말 대통령의 서명입니까? 혹시 가짜는 아니겠지요?”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아들아, 네가 의심한다고 사면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란다. 대통령의 약속이 너를 살린 거야.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렇다. 우리 구원의 절대적인 기초와 근거는 “내 손”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구원의 확신은 “내가 잘 붙들고 있는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는가?”에서 결정됨을 믿으라. 구원의 확신은 교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의 겸손'임을 놓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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