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교회 과제 5: '성육신적 선교'

박동식 교수
박동식 교수

앞에서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고 교회 건물에 갇히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선상에서 보자면 선교도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교는 우리의 신앙의 언어를 함부로 믿지 않은 이들에게 강압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게리 채프먼의 유명한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을 잘 아실 겁니다. 부부 사이를 진단하는 상담 책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말로 달콤한 말로 고백해도 상대방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제1 언어로 말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제1 언어를 배워 그 언어로 사랑을 고백해야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기독교 변증학의 핵심적인 방법적 도구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교회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를 세상에 그대로 이식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언어를 사용해서 그들과 공공의 자리에서 이야기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들과 우리는 인간이기에 공통의 언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공통 언어를 사용해 그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의 공통의 언어로 기독교의 언어를 번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와 시도를 하지 않고 여전히 교회 언어를 그들에게 주입하고자 한다면 기독교는 점점 더 세상에 설 자리가 없을 겁니다.

어느 신학자는,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으로 "번역"되었다고 하더군요. 공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번역되지 인간이 하나님으로 번역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사랑하셨기에 하나님 자신을 인간으로 번역시킨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 합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사랑한다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면, 신앙의 언어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번역을 '변질이다', '타락이다', '혼합이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세상과 담쌓고 살아가는 순수만 고집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순수인가요?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증거 할 때 선교하는 주체의 마음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을 강권하여 주의 집을 채우려는 목적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그들의 아픔이 무엇인지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그 마음이 필요하지 싶습니다. 말씀만을 전한다고 듣는 것이 아니지요. 수많은 방송 매체로 전한다고 믿지 않은 이가 듣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핑계를 무마시키기 위해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복음을 듣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의 본래적 의미일 겁니다. 믿지 않는 이들을 찾아가 복음이 들리도록 전파하지 않는데 그들이 어찌 듣겠습니까? 복음이 들리지 않는데 어찌 믿겠습니까? 이제는 전도나 선교가 믿지 않은 이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선포하는 자기 만족적 선교로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믿지 않은 이들과 친구라도 되어 보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어떤 언어를 쓰는지, 교회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그러한 기회와 장이 코로나 19를 통해 예기치 않게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기회입니다. 어떤 채널을 통해서도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세상과 만나 소통해야 합니다. 유튜브나 카톡이나 페이스북을 통해 세상과 접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어 자막을 넣으면 전 세계와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의 경계선이 흐려졌으니 이제는 세계가 우리 개교회의 교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선교의 범위가 확연히 넓어졌고 그 방식이 직접적일 수 있으니 매우 긍정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프로스트와 허쉬는 교인들이 교회 들어갈 때 "이 곳은 하나님의 집이니 경외감과 정숙함으로 들어갈지니라"라는 문구를 본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문구 자체를 비판할 것은 없지만 이 문구가 하나님이 "오직 여기에만" 계신다는 메시지를 준다고 합니다. 다르게 좀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교회에 붙여진 그 문구는 맞는 말이기에 그대로 두고, 교인들이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갈 때, 이런 문구를 제시하면 어떨까요? "세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이며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곳이니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낼지니라." 교회의 인 앤 아웃에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예배드리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해서 살아가는 신앙의 간극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또한 선교이겠지요.

선교해서 교회로 데려오기도 해야겠지만 이제까지 그렇게 해서 많이 오지 않고 있다면 이제는 방법과 방향을 좀 바꾸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을 그들의 문화에서 "끄집어내는"(extrational) 혹은 교회로 "끌어모으는"(attractional) 크리스텐덤 시기의 교회 전도로는 21세기에 특히나 코로나 19 이후에는 효력이 약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끌어모아도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선교적 교회의 성육신적 방법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별로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프로스트는 "만약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수많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다가갈 수도 없고 참여할 생각도 없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 제한해 버린다면 그것은 복음을 확실하게 방해하는 것"이라 합니다. 핵심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오라고만 하지 말고 교회가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구체적 방법은 신학자와 목회자가 머리를 맞대고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계속)

박동식(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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