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깨인’ 속죄는 이미 깨진 속죄다”(Woke atonement is broke atonement)를 최근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늘날 ‘깨어 있는(woke) 신학’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다. “죄를 책망하고, 율법 위반에 대해 정의를 요구하는 하나님”은 깨어 있는 신학에선 끔찍한 개념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깨어 신학이 정확히 무엇일까? 명확한 합의된 정의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깨어 신학은 현대 사회 정의 가치, 특히 권력, 억압, 정체성, 포용, 트라우마의 관점에서 하나님, 죄, 구원, 정의, 복음을 해석하는 ‘진보적’ 기독교 접근 방식이다. 비록 이 운동이 최근 몇 년간 주춤했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히 기독교 세계에 남아 있다.

깨어 있는 신학은 신적 분노를 학대적이라고 보고, 도덕적 범주보다는 치료적 언어를 우선시하며, 인간을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 아니라 해방이 필요한 피해자로 본다.

따라서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신 대리 속죄 개념은 완전히 거부된다. 대신, 다양한 그리스도의 속죄 이론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크리스투스 빅토르(Christus Victor), 예수께서 죄, 죽음, 악의 권세를 이긴 승리를 이루셨다는 것과 그리고 도덕적 영향(Moral Influence) 이론이 있다. 후자는 인간이 영적 질병에 걸려 있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시연이었다고 본다. 즉, 인간이 도덕적 삶을 살도록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댄 포스터(Dan Foster)는 자신의 글 Why I Stopped Believing God Needed to Kill Someone to Forgive Me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가신 것은 하나님 마음을 바꾸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가신 것이다. 인간의 폭력, 종교적 권력, 정치적 두려움의 무게를 드러내고 그것을 보복 없이 흡수하셨다. 증오 앞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십자가 위에서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 보복의 악순환을 깨고 계신 것이다.”

또 다른 글*What If God Didn’t Need Jesus to Die?에서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신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이 폭력에 중독된 세상과 마주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십자가는 대가(payment)가 아니라, 두려움 없는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성경적 그리스도의 속죄관

그리스도의 속죄(atonement)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며, 우리의 죄로 인한 죄책과 형벌의 고리를 끊는 수단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11) 그 결과, 스스로는 의롭지 않은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된다. 이를 칭의(Justification)라 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8).

포스터는 “십자가는 대가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십자가가 대가였음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속죄의 방식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있어왔다. 도덕적 영향, Christus Victor 외에도, 보복, 몸값, 선택적·필요한 만족, 정부적, 신비적 속죄 이론 등이 있다.

성경적으로 정확하며 깨어 신학이 “우주적 폭력”이라 거부하는 이론은 형벌적 대리 속죄(Penal Substitution) 이론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정의가 침해되었기 때문에,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대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 신적 진노, 우리에게 실제 죄책이 존재함, 화목과 속죄의 필요라는 성경적 기반 위에 있다.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는 Atonement and the Death of Christ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정당히 받아야 할 형벌을 자발적으로 받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훼손하지 않고도 죄를 용서하실 수 있도록 신적 정의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하지만 깨어 있는 신학 지지자들에게는 분노, 죄, 정의, 사랑이 재정의되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그들에게 분노는 곧 해악이고, 인간은 피해자이며 죄책이나 판단이 없다고 본다. 하나님의 율법은 치료적 윤리가 되고, 죄책은 트라우마로 치환되며, 포용이 거룩함을 압도하고, 폭력은 악으로 여겨져 십자가 사건은 속죄 사건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재정의된)일 뿐이므로 진노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이 성경을 읽고 구약, 요한계시록, 마태복음 24장을 이해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롬 6:23).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를 함께 이루셔서, 악을 파괴하면서도 우리를 파괴하지 않으실 수 있다. 형벌적 대리 속죄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정의뿐 아니라,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객관적 화목, 복음의 역사적·성경적 기반,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에 대한 확신까지 훼손된다.

시몬 J. 키스테마커(Simon J. Kistemaker)는 고린도후서 주석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사랑과 평화로 손을 내밀며도, 왜 죄에 대한 분노를 극복하셨는지 의문이 있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아들을 우리의 대신 죄를 짊어지게 하셨음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우리 죄의 형벌을 치르게 하심으로, 우리가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짊어지셨다” (갈 3:13).

결국, 깨어 있는 신학이 분노하시는 하나님과 대리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성경을 자신들의 사회적 관점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의 상호 연관성을 오해한 것이다 — 진노와 사랑은 그중 일부일 뿐이다.

형벌적 대리 속죄가 올바른 성경적 해석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반응해야 한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살전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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