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벡(Isaac Beck)은 작가이며 체인지드 무브먼트(Changed Movement)에서 대외협력 및 정부 관계 프로젝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미국과 이스라엘이 공동으로 이란을 공격하면서 중동의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며 필자는 오래전 경험했던 한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그 사건은 신앙과 용기, 그리고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세속 세계가 단순한 지정학적 갈등으로 바라보는 사건들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더 큰 영적 서사를 본다. 억압이 무너지고 복음이 확장되는 이야기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역할과 그의 개인적 결점에도 불구하고 폭정에 맞서는 결단의 사례로 보이며, 그것이 이란 국민에게 자유의 길을 열고 영적 부흥의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시각이 크게 바뀐 것은 2021년 이라크의 한 은밀한 모임에서였다. 장소는 어디인지 정확히 밝힐 수 없는 작은 은신처였다. 그곳에는 키보드의 잔잔한 연주와 함께 담대한 사명을 위한 기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다섯 명의 이란 여성들이 서 있었고, 그들을 둘러싸고 약 15명이 모여 있었다. 현지 쿠르드족 신자들, 오랜 세월 현지에서 사역해 온 서구 선교사들, 서구의 편안한 삶을 내려놓고 현장 사역에 뛰어든 이들, 그리고 그 순간을 지켜보는 필자였다.
이 여성들은 국경과 ISIS 검문소를 지나 며칠 동안 위험한 여정을 거쳐 그곳에 도착했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기도를 받고 영적 파송을 받은 뒤 다시 이란으로 돌아가, 서로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마을과 외딴 지역, 소수 민족 공동체에 지하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여전히 금지된 속삭임처럼 존재하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었다.
그들의 기도는 서구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기도와는 달랐다. 재정적 축복이나 일상의 불편을 해결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대신 그들의 기도는 단순하고 단호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듣게 하소서.” 그들의 삶은 빌립보서 1장 21절의 고백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들이 감수해야 할 위험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란 정권 아래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단지 자신들의 처형 위험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투옥되거나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상황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은신처에서 안수 기도를 받던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나 슬픔 대신 깊은 기쁨이 있었다. 순교의 가능성은 현실적인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들을 믿음으로 이끄셨는지 이야기했다. 그중 일부는 ‘흰 옷 입은 사람’에 대한 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중동의 이슬람 지역에서 널리 보고되는 현상으로, 요엘서 2장 28절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들 가운데는 어린 시절부터 늘 함께였던 두 자매도 있었다. 이제는 30대 후반이 된 이 자매는 이번 사명을 위해 서로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야 했다. 이 땅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서구 사회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희생이었다. 그들의 헌신은 필자를 깊이 겸손하게 만들었다. 이후 신앙의 의심이나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필자는 그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하나님이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라는 그들의 흔들림 없는 확신이 필자에게도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바로 그 박해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이야기가 보여 주었다.
이후 이란에서 이스라엘의 공습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필자의 마음에는 복잡한 감정이 일어났다. 중동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은 종종 소수에게만 이익을 주고 일반 시민들에게는 큰 고통을 남겼다. 필자가 그 지역을 여행하면서 느낀 것도 그러한 모순이었다. 강한 반미 정서와 동시에 미국에 대한 깊은 감사가 공존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 필자가 단순한 석유 이해관계로 보았던 미국의 개입을 실제로는 독재에서 벗어나게 한 해방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필자에게 다가와 “고맙다”고 말하기도 했다. 단지 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감사가 전달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이 불완전한 행동조차도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로마서 8장 28절이 말하듯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습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사망을 확인했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와 공식 발언을 통해 하메네이를 “역사상 가장 악한 인물 중 하나”라고 지칭하며, 이번 작전이 정권의 희생자들에게 정의를 가져오는 사건이며 이란 국민이 자신의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라고 말했다.
그 순간 필자에게는 단순한 애국심을 넘어서는 어떤 인식이 찾아왔다. 원칙을 지키는 지도력이 성경적 정의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개인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고 억압적인 정권에 맞서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보여 왔다.
물론 이것이 트럼프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결정에는 정치적 계산이나 전략적 이해관계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결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의로운 목적을 이루신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고레스 왕이다. 하나님은 이방 왕이었던 고레스를 “내 목자”라고 부르며(이사야 44:28)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와 비슷하게 트럼프의 행동 역시 이란의 자유를 가로막아 온 장벽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이란 정권은 급진적 이념을 바탕으로 종교 자유와 인권을 억압해 왔다. 하메네이의 죽음은 그 체제의 중심을 흔드는 사건이며, 이는 민주적 변화의 가능성을 열 뿐 아니라 무엇보다 복음이 더 자유롭게 전해질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로 알려진 이란의 지하교회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더욱 공개적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지상명령이 가장 제한된 지역 중 하나에서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다.
물론 비판자들은 이러한 개입을 제국주의적 행동이나 석유 이해관계로 해석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정치 이상의 의미로 보일 수 있다. 하나님이 고대 제국의 몰락을 통해 자신의 백성을 해방시키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억압적 체제를 무너뜨리는 과정 속에서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란의 오랜 상징인 ‘페르시아의 사자’가 다시 울부짖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항이 아니라 부흥의 소리일 것이다.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를 누리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경험하는 이란을 상상해 보라. 그날이 온다면, 복음을 듣는 “단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던 그 여성들의 기도는 결국 수백만 명에게 영원한 소망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정의, 그리고 박해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부름 받았다(히브리서 13:3).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 속에서 어떤 이들은 혼란 속에서도 정의의 작은 빛을 보게 된다. 악에 맞서고 약자를 보호하며 영적 각성을 위한 환경을 만들려는 지도자의 모습을 본다는 것이다.
전쟁의 먼지가 가라앉고 이란에 새로운 새벽이 오기를 바란다. 폭정이 진리에 자리를 내어주고, 복음이 자유롭게 울려 퍼지는 날 말이다. 세계가 이 순간을 지켜보고 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진하기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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