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당신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가?’(Does your prayer change God’s mind?)를 2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여전히 기도에 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필자만은 아니다. C.S. 루이스 역시 같은 고백을 했다.
루이스는 「기도의 효력(The Efficacy of Prayer)」이라는 에세이에서,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깎아야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고 이발소에 갔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곳에 도착하자 이발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 오늘 오시기를 제가 기도하고 있었어요.” 루이스는 그 타이밍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사실 내가 하루나 이틀만 늦게 왔어도 그는 나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루이스는 곧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일이 “우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기도의 효력을 증명하는 증거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기도한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애초에 일어날 예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설령 그 일이 분명한 기적이었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기도 때문에 일어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소 씁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루이스의 말은 옳다. 우리는 이미 이런 장면들을 여러 차례, 다양한 방식으로 목격해 왔을 것이다.
선한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를 받았고, 어떤 경우에는 그 기도가 분명히 응답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반대로, 전혀 기도를 받지 못한 이들에게서 오히려 선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를 받는 사람 모두에게 혼란과 좌절을 안겨준다.
이럴 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로 돌아가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바로 그 지점에 우리의 고뇌가 머물러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 함께, 결과가 언제나 우리의 기대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게 된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신약성경에는 우리의 기도가 언제나 응답될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분명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 수는 없다.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우리는 그와 정반대되는 명백한 사례를 만나기 때문이다. 겟세마네에서 가장 거룩한 간구자이신 예수께서 세 번이나 그 잔이 자신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 사실 이후로, 기도를 어떤 무조건적인 만능 장치처럼 여기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하지만 이런 수용은 거의 항상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주권자시며 “끝을 처음부터 고하시는 분”(사 46:10)이라면, 우리의 소원과 기도가 과연 하나님의 손을 움직일 수 있는가?
더 나아가, 하나님이 이미 어떤 일을 결정하셨다면,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어 다른 결과를 낳게 할 수 있는가?
“네가 내게 기도하였으므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첫 단계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불변성(immutability)’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변성이란,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증언하는 말씀이 많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신다”(민 23:19),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말 3:6), “속지 말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각종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6–17).
그렇다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이 이미 다르게 정하셨다면 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구약에서 같은 인물과 관련된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바로 이스라엘의 왕 히스기야다.
첫 번째 사례에서, 예루살렘은 앗수르 왕에게 함락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멸망을 선언한다.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성전에 가지고 가 하나님 앞에 펼쳐 놓고 구원을 간구한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이렇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에 관하여 내게 기도하였으므로 내가 네 말을 들었노라”(왕하 19:20, 강조는 원문).
하나님은 이어서, 이전에 이미 말씀하셨던 앗수르 왕의 패망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증하신다(왕하 19:7). 이 장면에서 히스기야의 기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두 번째 사례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무렵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서 나가기도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여호와 곧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보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사흘 만에 네가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생명에 십오 년을 더하겠으며”(왕하 20:1–6).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히스기야가 기도하자 다시 한 번 “내가 네 기도를 들었다”는 선언과 함께 즉각적인 유예를 허락하신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이 즉각 바뀐 사례가 아닐 수 있을까?
필자의 신학교 교수였던 토머스 하우 박사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맞추기 위해 상황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맞춰지도록 하시기 위해 그런 상황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믿음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그렇게 하신다는 설명이다.
하우 박사는 이를 구원의 경험에 비유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기 전까지, 하나님은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문다”(요 3:36)는 상태를 분명히 정해 두셨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모든 것이 바뀐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9).
구원 이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구원 이후에는 진노가 제거되고 사랑과 은혜가 적용된다. 그리고 그 상태 역시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변하신 것일까? 아니다. 변한 것은 우리다.
기도와 관련해 R.C. 스프로울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가 정말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내는가? 기도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바꾸는가?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가?’ 나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답했다. 만약 그가 ‘기도가 상황을 바꾸는가?’라고 물었다면, 나는 ‘물론이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여전히 모든 것이 완전히 명확한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 우리의 기도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위한 그분의 변함없는 계획을 이루신다. 그 이상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더 깊이 이해하려고 계속 고민하고 있으며, 아마 평생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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