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길선주 장로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 일곱 분 목사님들 중의 한 분으로 안수를 받았고,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고, 총회 전도국장이 되어 6년간 시무했습니다. 1908년 3월 1일에는 한국교회 역사상 목사로는 처음으로 세례식을 거행했습니다. 1919년 길선주 목사님은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시다가 2년간 옥고를 치루었는데, 옥중에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와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출옥 후에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폐회 축도를 마치고 뇌출혈로 쓰러져 35 곳의 집회를 남겨두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으로 옮겨갔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아버지"로 한국교회를 세우는데 한 평생을 다 쏟아바치고 하나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길선주 도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그 다음 이기풍 깡패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로, 이기풍은 선교사를 때려 눕힌 핍박자였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그는 1865년 12월 23일 평양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어릴 때부터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을 미워했습니다. 한 번은 평양 거리를 지나가던 평양 좌수의 거만한 행렬을 바라보다가 울화통이 치밀어 달려 들어 좌수를 땅 바닥에 내동댕이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체포되어 형틀을 목에 메고 고생했다고 합니다. 그는 지배층에 대한 반항심을 품고 주먹과 머리를 휘두르는 박치기 깡패로 유명했지만 학문에 대한 소질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섯 살 때 사서오경을 줄줄 외웠고 열 두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서 붓 글씨를 써서 장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서양 사람들을 미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우리 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음흉한 계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양 사람의 한 사람인 쌤 마펫 선교사가 이기풍이 지배하고 있던 평양 거리에 들어와서 날마다 복음을 전하자 깡패 두목인 이기풍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가 29세 되던 1893년이었습니다. 이기풍은 28세(한국 나이로는 29세)였습니다. 이기풍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마포 삼열 선교사의 말이 너무나 듣기가 싫었습니다. 그런 말을 못하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그의 턱을 부서뜨렸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피 투성이가 되어 길 모퉁이에 쓸어졌습니다.

그러나 마포 삼열 선교사는 수 많은 핍박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끈질기게 전해서 그 이듬해인 1894년에는 22명에게 학습을 베풀었고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에 교회당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장대현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기풍은 서양 사람이 교회당을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당 건축이 진행되고 있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이기풍은 깡패들을 동원해서 교회당 건축현장을 모주리 때려 부시고 온통 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교인들은 너무나 분개하여 모두들 맞서서 싸우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포 삼열 선교사는 교인들을 달래며 말렸습니다. 그리고 깡패들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평양성 전체에 퍼졌습니다. 이때부터 평양 시민들은 그를 가르쳐 "마포 선교사"라고 부르며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선량한 사람'으로 평양에서 유명해졌습니다. 선교사의 턱을 부서뜨리고 교회당을 때려부순 이기풍은 의기양양했지만 양심 한 구석에 찔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잠을 자는데, 꿈에서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그는 너무 놀라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항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당시 청일전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서 잠시 원산으로 가서 피신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의 앞에 이상한 옷 차림을 한 서양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평양 거리의 마포 삼열 선교사와 비슷한 모습의 서양 사람이었는데 원산에서 선교하고 있던 스왈렌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이기풍을 보자마자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우뢰 소리와 같았습니다. 결국 이기풍은 스왈렌 선교사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94년이었습니다.

이기풍은 즉시 마포삼열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 앞에 무릎을 꿇어 백배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잃었던 한 마리 양이 돌아온 것을 바라보며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부터 이기풍은 평양 시내를 누비며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깡패가 전도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평양 온 성안을 발칵 뒤집었습니다. 그는 동만 트면 나가서 전도하는 한국의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를 서양 귀신에 미쳤다고 조롱하고 멸시하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서 활동과 선교사를 돕는 일을 하면서 예수를 전했습니다. 1896년에는 마포 삼열 선교사와 함께 함경도 지방으로 긴 전도 여행을 다녀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예수를 전하기에는 너무 무식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3년에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전도자와 목회자로서의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국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던 해인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이기풍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7인 목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둘째로, 이기풍 목사님은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마포 삼열 목사님의 선언에 의하여 우리 나라 최초 일곱 목사님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한국교회가 정식으로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노회 셋째 날인 9월 19일 길선주 목사님의 사회로 열린 노회가 선교사들의 헌신적 노력에 보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한 사람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를 했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풍속이나 방언이 다른 외국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때 이기풍 목사님이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기로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자신도 흑암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돌 팔매질을 당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도 사도 바울의 발걸음을 따라 복음의 빚을 갚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교사로 떠나기로 준비하는 동안 그는 마음이 약해져서 제주도 가기를 주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윤함애 사모는 남편을 격려했습니다. "우리가 안 가면 누가 불쌍한 영혼을 구하겠어요. 주저말고 속히 떠납시다." 결국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1908년에 제주도를 향해 평양을 떠났습니다. 아기를 등에 업고 개나리 봇짐을 머리에 얹고 평양성을 떠나 인천항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고 울지 않는 여전도회 회원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 가족은 조그마한 목선을 타고 인천항을 떠나 여러 번 풍랑을 만나며 간신히 군산항을 거쳐 목포에 이르렀으나 거센 풍랑으로 사모는 함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모와 아이를 목포에 당분간 남겨두고 이기풍 목사님만 먼저 제주도를 향해서 떠났습니다. 제주도를 향하던 배가 난파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으나 이기풍 목사님은 간신히 헤엄을 쳐서 추자도에 상륙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경험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13년 동안의 제주도 복음화 사역은 수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고 미신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잘 곳도 얻지 못했고 먹을 것도 얻지 못해 때로는 산 기슭에 때로는 바닷가에 때로는 마구간에 쓸어져 기운이 없어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모래 사장에 쓸어져 있는 이기풍 목사님을 해녀가 발견하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살린 일도 있었습니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면 마치 그에게서 가까이 하면 죽기라도 할 듯이 손을 흔들며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라 내 목이 다라 난다" 라고 말하면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너무도 힘이 들고 괴로워서 제주도를 떠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주도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그 사실을 편지로 써서 인편에 마포 삼열 선교사님에게 보냈습니다. 두어 달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하시오." 이기풍 목사님은 그 편지를 받아 읽고서 그 자리에 쓰러져서 대성통곡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얼마동안 울다가 일어나니 성령님의 역사로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희망과 용기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산 속 동굴 안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구렁이를 때려 눕힌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이기풍 목사님과 사모님이 금식하고 기도하므로 미치광이를 고친 일도 있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13년 동안의 제주도 사역을 통해 제주도에서 사탄 마귀의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추게 했습니다. 3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1934년에는 제주도 독노회를 조직하게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성공적인 제주도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기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나환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제주도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두 개의 새벽 별들이었습니다.

셋째로, 이기풍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평생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 복음 사역을 마친 후에도 한국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특히 전라도 복음화를 위해서 그의 남은 생애를 바쳤습니다. 광주 순천 고흥 벌교 여수 남면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에서 복음을 전했고 1927년에는 다시 제주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1921년에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제10대 총회장으로 한국교회를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며 한국교회를 봉사하다가 성대가 막혀서 말을 못하기도 했고 관절염 귀병 등으로 심한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1936년을 기점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그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투쟁했습니다. 일제는 그를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1938년 체포해서 순천 감옥에 투옥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갖은 고문을 가했습니다. 칠순의 노구로 당한 일경의 취조와 고문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순천에서 광주형무소로 이감되는 도중에 그는 쓸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그의 마지막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기풍 깡패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을 귀중하게 보시고 죄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이상한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길선주 도사와 이기풍 깡패를 부르시고 은혜와 사랑을 베푸셔서 한국교회의 아버지들로 삼으시고 목회자와 선교사로 사용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이상한 분이시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의인들보다는 죄인들을 부르시며 은혜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셔서 앞으로 여러분들을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전파하는 귀중한 일꾼들로 사용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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