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서 글로벌 경쟁이 격해지면서 국내에서도 투자 활성화를 위한 금산분리 규제 완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재계는 세계적으로 기술 패권 경쟁이 자본력 중심의 경쟁으로 전개되고 있는 만큼, 기업이 대규모 투자 재원을 마련할 수 있도록 규제를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 산업과 기업에 대한 특혜 논란, 금융자원의 사금고화 우려 등 부작용 가능성도 적지 않아 사회적 논쟁이 확대되고 있다.

금산분리 완화 논의의 발단은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에서 비롯됐다. 이 대통령은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와의 회동에서 “AI 투자의 규모가 워낙 커 재원 조달에 어려움이 있다”며 “독점 폐해를 방지할 안전장치를 전제로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을 계기로 기획재정부 등 경제부처가 관련 검토 작업에 속도를 내며 논의가 본격화됐다.

금산분리는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소유·지배하는 것을 제한해 재벌의 금융 사금고화를 방지하고, 산업 부문의 부실이 금융시장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1980년대 도입된 제도다. 특히 SK 등 지주회사 체제를 운영하는 대기업에는 보다 엄격한 규제가 적용돼 왔다.

재계는 급변하는 산업 환경에서 모든 금융업 소유를 제한하는 현행 규제는 기업의 투자 능력을 지나치게 제약한다고 지적한다. AI와 반도체 분야는 장기·대규모 투자가 필수적이지만 기업의 자기자본이나 차입만으로 이를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해외에서는 오픈AI·오라클·소프트뱅크가 함께 참여한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처럼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협업해 대규모 AI 인프라 투자에 나서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국내 재계는 일반지주회사가 투자회사(GP)를 설립해 펀드를 직접 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요구를 꾸준히 제기했다. 특히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규제 완화에 대한 요구가 크다. 대기업의 축적된 경영 경험과 기술 역량이 스타트업 투자에 활용되면 혁신 속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논리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대기업이 금융기관 및 정부 펀드와 함께 투자해야 성공 확률이 높다”며 금산분리 완화를 공개적으로 요청했고,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 역시 “CVC를 금산분리로 묶는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강조했다.

2021년 일부 도입된 CVC 제도는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금산분리 규제 완화 사례이지만, 지주회사의 100% 지분 소유 의무, 외부 투자금 40% 제한, 부채비율 200% 규제 등 제약이 여전히 많아 활용이 쉽지 않다는 비판이 재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SK하이닉스 등 지주회사 손자회사가 증손회사를 100% 지분으로만 보유해야 하는 규제 역시 완화 요구의 대상이다.

전문가들은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제한적인 금산분리 제도 개선은 필요하다고 보지만, 근본 원칙 자체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정환 한양대 교수는 “보조금 중심의 미국식 지원정책은 한국 재정 여건상 현실적이지 않다”며 “재벌 사모펀드가 무리한 사업 확장에 이용되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한다면 일부 규제 완화는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규제 때문에 내부 자금을 활용하지 못하는 사례는 개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신중 접근을 요구하는 시각도 강하다. 산업자본이 펀드를 운용할 경우 금융자원이 사익 추구에 활용될 가능성, 금융회사가 재벌 계열사의 무리한 확장이나 내부 지원에 동원될 우려 등이 그 이유다.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 논란이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황 고려대 교수는 “금산분리를 일부 완화하더라도 사용 목적을 구체적으로 규정해야 한다”며 “추상적인 기준만 둘 경우 사실상 금산분리 제도 자체가 무력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부처 간 입장 차이도 뚜렷하다. 기획재정부·산업통상자원부·금융위원회는 규제 유연화 쪽에 무게를 두는 반면, 공정거래위원회는 신중론을 고수하고 있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오랜 제도를 일부 기업의 요구만으로 바꿀 수는 없다”며 “기업이 가장 효율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은 자체 이익 기반의 R&D와 혁신 투자”라고 강조했다. 또한 “현재도 금융시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며 규제 완화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처럼 찬반이 엇갈리는 가운데 정부와 여당은 현행 규제를 유지하되 AI 등 첨단산업 투자에 한정해 한시적 예외를 허용하는 절충안을 검토하고 있다. 박상혁 의원이 발의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지주회사 손자회사가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에 ‘첨단전략산업기금’이 지분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일몰 조항을 둬 한시적으로 ‘100% 지분 보유’ 규제를 완화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또한 CVC의 외부 자금 조달 비율을 40%에서 50%로 상향하고, 해외 투자 한도를 20%에서 30%로 확대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전문가들은 규제 완화 과정에서 기업의 펀드 운용이 사익 편취 수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명확하고 엄격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금산분리 원칙을 유지하되 AI 같은 전략 산업에 한해 한시적 예외를 두는 것은 가능하다”며 “계열사 지원이나 부당 자산 이전을 막을 구체적 규정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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