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호남권에 제2의 반도체 생산기지를 조성하고 전국에 초대형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핵심 기반시설인 전력과 산업용수 공급 대책이 여전히 구체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의 발표를 들은 뒤 “기후부 장관이 제일 힘이 넘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장관이 제시한 내용은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에 약 6.3GW의 전력과 하루 65만t의 물이 필요하다는 전망과 “정부가 책임지고 공급하겠다”는 원론적 설명에 머물렀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구상이 알려진 이후 산업계의 관심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서남권에 총 800조 원을 투자하는 대형 프로젝트가 실제로 가능한지에 쏠렸다.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안정적인 전력과 막대한 양의 초순수·공업용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전력망, 발전원, 용수원, 도수관로, 재이용수 활용 방안 등이 프로젝트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꼽힌다.
정부는 이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서남권 제2 반도체 생산기지, AI 데이터센터에 전력과 용수를 적기에 공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발표 내용만으로는 실제 공급 경로와 인프라 구축 일정, 투자 규모, 가뭄 대응 계획 등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 “전력·용수 책임 공급” 밝혔지만 세부 해법은 부족
김성환 장관은 정책 발표에서 “서남권 반도체 공장에 필요한 6.3기가와트(GW)의 전력과 하루 65만t의 용수를 차질 없이 공급하겠다”며 “그 이상의 물과 전기도 미리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용인 반도체 팹에 필요한 약 15GW의 전력과 하루 150만t의 용수도 차질 없이 공급하겠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망 문제를 ‘접속선로 신속 구축’으로 해결하고, 전력 조달은 ‘풍부한 재생에너지와 원전 활용’을 통해 추진하겠다고 설명했다. 용수는 다목적댐과 발전용수, 대체 수자원 등을 활용해 공급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전력 공급 대책은 안정성과 비용 측면에서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호남권의 주요 재생에너지원인 태양광은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출력 변동성이 크다. 메모리 반도체 팹처럼 중단 없는 전력 공급이 필요한 산업시설의 기본 전원으로 활용하려면 별도의 보완 발전원과 계통 안정화 대책이 필요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제시되지 않았다.
김 장관은 향후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수요 전망과 발전원 구성을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상준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전력망 보강은 당연한 과제지만, 간헐성이 큰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어떻게 조화롭게 연계할지, 비용과 안정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구체적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 하루 65만t 용수 공급, 실제 가능성 놓고 의문
산업용수 확보 방안도 논란의 중심에 있다. 정부는 서남권 제2 반도체 생산기지에 도수관로를 신속히 건설하고 다목적댐과 대체 수자원을 활용해 안정적인 용수 공급 기반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AI 데이터센터 집적화에 따른 물 수요 증가에도 대응하겠다는 계획이다.
김 장관은 앞서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영산강·섬진강 유역에는 섬진강댐과 주암댐 등 7개 댐에 약 15억t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며 “이들 댐이 공급할 수 있는 생활·공업·농업·하천유지용수는 하루 337만t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부 댐의 수계 조정과 여유 용량 활용 등을 통해 하루 100만t 이상의 산업용수를 추가 확보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국민보고회에서는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요한 용수 규모를 하루 65만t으로 제시했다. 기존에 언급한 추가 공급 가능량과 실제 필요량 사이의 관계에 대해 보다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대 한국수자원공사 사장은 자유토론에서 “서남권 댐의 현재 여유량과 일부 조정량을 더하면 40만~50만t 수준”이라며 “지자체의 발전·농업용 댐을 활용하면 30만t 이상 추가 확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광주 하수처리장만 해도 하루 60만t 규모로, 재이용을 통해 상당량을 확보할 수 있다”며 필요할 경우 ‘댐 증고’를 통해 추가 여유량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문서상 수치와 기후 현실 다르다” 비판
정부는 기존 수자원 계획에서 배분됐지만 실제 사용되지 않는 ‘과배분 미사용량’을 재산정하고, 수계 조정을 통해 필요한 물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문서상 가능한 물량과 실제 가뭄 상황에서 확보 가능한 물량은 다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영산강과 섬진강 유역은 한강에 비해 유역 면적이 작아 장기 가뭄 시 대응 여력이 제한적이다. 이 때문에 기존 댐의 여유량이나 수계 조정만으로는 대규모 신규 산업용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실제로 2023년 남부지방 가뭄 당시 광주·전남의 핵심 식수원인 주암댐 저수율은 20% 아래로 떨어졌다. 정부가 대체 수자원으로 언급한 농업용 저수지 역시 수리권 문제와 가뭄 시 농업용수 부족, 지역 간 갈등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이중열 물복지연구소장은 “기존 수자원 계획에 반영되지 않았던 대규모 수요를 기존 댐 체계의 ‘짜내기’ 방식으로 감당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가뭄으로 댐 수위가 낮아지면 ‘여유 용량’이나 ‘재배치’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 AI 데이터센터까지 더해지면 수요 확대 불가피
정부의 메가프로젝트에는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뿐 아니라 전국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구축 계획도 포함돼 있다. AI 데이터센터 역시 서버 냉각과 설비 운영 과정에서 상당한 전력과 용수를 필요로 한다. 반도체 생산시설과 데이터센터가 동시에 확대될 경우 산업용수 수요는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환경부(현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해 ‘제1차 하천유역수자원관리계획’에서 산업시설 증가와 기존 댐 여유량 부족 등을 이유로 장래 연간 7억4000만t의 생활·공업용수가 부족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용인 반도체 첨단산업단지 등 신규 산업시설 증가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서남권 반도체 생산기지와 초대형 AI 데이터센터가 추가로 추진될 경우, 영산강·섬진강 수계만으로 안정적인 용수 공급이 가능한지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현재 검토 중인 계획만으로도 산업용수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입증하려면 댐별 활용 가능 물량, 하수 재이용 규모, 도수관로 건설 일정, 지역 간 수리권 조정 방안, 가뭄 시 비상 공급 대책 등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구체적 일정·비용·공급 경로 공개 필요
업계에서는 정부가 전력과 용수 공급을 책임지겠다고 밝힌 것만으로는 대규모 반도체 투자와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따른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한 번 입지가 결정되면 수십 년간 운영되는 장기 산업인 만큼, 초기 단계에서 인프라 리스크를 명확히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통합용수공급사업 조기 완료와 용수 재이용률 확대 계획이 제시됐지만, 서남권 제2 반도체 생산기지의 경우 도수관로 건설과 다목적댐 활용, 대체 수자원 공급 방안의 구체적 일정과 규모가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전력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병행 활용하겠다는 방향은 제시됐지만, 실제로 반도체 팹에 필요한 24시간 안정 전력을 어떤 발전원 조합과 송전망 구조로 공급할지, 계통 보강 비용과 지역 수용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설명은 추가로 필요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용수 확보가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 공급 경로와 사업 일정, 투자 규모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돼야 시장도 안심할 수 있다”며 “하수 재이용이나 댐 증고 등 보완 방안에 대한 세부 계획도 함께 공개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메가프로젝트는 국가 산업 구조를 재편할 수 있는 대형 구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전력과 산업용수 대책이 구체적인 실행 계획으로 뒷받침되지 못할 경우, 800조 원 규모의 청사진은 기대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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