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30일 서남권 산업단지 후보지 항공 시찰을 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30일 서남권 산업단지 후보지 항공 시찰을 하고 있다. ©청와대

◈ 삼성·SK ‘호남 반도체’ 투자 발표 후 전력 대책 논란

삼성전자와 SK그룹이 서남권에 대규모 반도체 산업단지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구축 계획을 내놓은 가운데, 전력과 용수 공급 대책이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호남 반도체 산단을 이재명 대통령 임기 내 완공하고, 용인 반도체 산단 완공 시점도 앞당기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가 안정적으로 가동되기 위해 필요한 전력 공급 계획은 여전히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관련 계획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추진하는 반도체 산업단지와 AI 데이터센터 구축에는 2040년까지 27.7GW 규모의 전력 설비가 추가로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설비 용량 1.4GW급 신형 원전 약 20기에 해당하는 규모다. 현재 국내에서 가동 중인 원전은 총 26기, 설비 용량은 약 26GW 수준이다.

용인 반도체 산단의 전력 문제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용인에 조성 중인 반도체 산단에는 각각 9GW와 6GW, 총 15GW의 전력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강원 동해안과 충남 서해안 발전원을 활용해 12GW 확보 계획은 마련됐지만, 나머지 3GW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책이 제시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서남권 반도체 산업단지와 전국 AI 데이터센터 건설 계획을 추가로 발표하면서, 전력 공급 대책보다 정치적 일정과 속도전에 무게가 실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시설인 만큼, 입지 선정과 투자 발표 이전에 발전원과 송전망 계획이 먼저 마련됐어야 한다는 비판이다.

◈ “0.01초 정전도 치명적”… 반도체 공정의 전력 리스크

반도체 생산 설비는 전력 공급이 짧은 시간만 끊겨도 전체 공정이 멈출 수 있다. 반도체 공정은 미세한 전압 변화에도 민감하며, 한 번 정전이 발생하면 생산 중이던 웨이퍼 폐기와 설비 재가동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실제 삼성전자는 2021년 미국 텍사스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이 한파와 정전으로 한 달 이상 가동을 멈추면서 웨이퍼 약 7만 장을 폐기했고, 5000억 원이 넘는 손실을 입은 바 있다. 업계에서는 공장 건물과 생산설비 완공 시점을 앞당기더라도 안정적인 전력 확보가 이뤄지지 않으면 실제 가동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과 대만 등 주요 반도체 생산국은 반도체 팹 유치 단계부터 전력망과 용수, 송전 인프라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용인 반도체 산단의 전력 공급 문제조차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가운데, 서남권 신규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 건설 계획이 먼저 발표됐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김성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팹과 데이터센터의 전력 사용량이 막대한 만큼, 건설 계획이 나오기 10년에서 15년 전부터 전력 수급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공장 완공 시점만 앞당기는 속도전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며, 국가 차원의 전력 수급 계획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송전망 포화 속 ‘서남권 반도체’ 추진… 구체 청사진은 빠져

정부는 이번 발표에서 송전망과 변전소 확충, 접속 선로 구축 등을 통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어느 지역에 어떤 발전 설비를 얼마나 확충할지, 송전망을 어떻게 연결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제시하지 않았다.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6.3GW의 전력이 필요하고, 전국 곳곳에 들어설 AI 데이터센터에는 18.4GW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용인 반도체 산단의 미확보 전력까지 고려하면 전체 전력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초 공개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도 정부는 2038년까지 10.3GW 규모의 전력 설비가 부족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송전망 문제도 주요 걸림돌로 꼽힌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포함된 54개 송전망 건설 사업 가운데 20개는 지역 주민 반대와 지방자치단체 인허가 지연 등으로 추진이 지연되고 있다. 발전 설비를 확보하더라도 전력을 반도체 산단과 데이터센터까지 안정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면, 대규모 투자 계획은 실제 가동 단계에서 차질을 빚을 수 있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는 반도체 공장보다 더 빠르게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초고성능 연산을 처리하는 AI 데이터센터는 일반 데이터센터보다 전력 소비량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SK 등 기업들의 계획대로라면 2029년까지 불과 3년 안에 신규 원전 6기에 맞먹는 전력 설비가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 이 대통령 “호남에 대한 역사적 보상”… 투자 배경 논란

이재명 대통령은 30일 광주에서 열린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서 삼성전자와 SK그룹의 호남 반도체 투자에 대해 “차별의 고통과 설움을 견뎌내며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켜온 호남에 대한 역사적·국민적 보상으로 생각하고, 일체의 차질 없이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번 투자를 통해 영·호남 간 지역 격차를 일부나마 해소할 수 있게 돼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표현으로 알려진 “약무호남 시무국가”를 인용하며 호남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같은 날 국무회의에서도 이 대통령은 “지금만 보면 호남 지역에 투자가 다소 많은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과거 누적 투자 규모를 고려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영호남 간 불균형이 존재해 왔다는 점을 인정하며, 새로운 산업 환경이 이를 완화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은 투자 결정의 경제성과 산업 전략보다 정치적·지역적 명분이 앞선 것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야권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호남에 대한 역사적 보상”을 언급한 점을 들어, 이번 투자가 정치적 목적에 따라 추진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 야권 “정치적 목적 투자 유도”… 기업 압박 논란

국민의힘 등 야권은 이번 투자 발표가 전력과 용수 공급 대책을 충분히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이 대통령이 “좋게 말하면 유도, 심하게 말하면 유인”이라고 표현한 데 대해, 정치적 목적에 따라 호남을 선택하고 기업의 투자 결정을 압박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호남 투자 유도는 있었지만 강요나 압박은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기업이 경제적 판단에 따라 결정한 것이며, 정부는 수도권 과밀과 전력 문제 등을 고려해 서남권이 더 나은 투자 환경이 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팹 건설이 호남과 용인에서 동시에 진행될 것이라고 밝히며, 주요 기업들과 사전에 협의를 마쳤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야권은 이를 두고 정부가 기업의 투자 순서와 입지 결정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라고 주장하며, 필요할 경우 정치적·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 기업은 안정 전력 요구… 정부는 신재생 중심 접근

이날 행사에서도 전력과 용수 공급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공개되지 않았다. 정부는 용지, 전력, 용수 등 핵심 인프라 구축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밝혔지만, 실제 확보 방안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투자 발표 과정에서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할 원전 확대와 PPA, LNG, 열병합 발전 등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반도체 공장의 특성상 태양광과 풍력 등 변동성이 큰 전력원만으로는 안정적인 운영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날씨와 계절에 따라 발전량 변동이 크다. 24시간 중단 없이 가동돼야 하는 반도체 공정에는 안정적인 기저 전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인식이다. 특히 반도체 팹은 정전뿐 아니라 전압의 미세한 변동에도 민감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은 행사 이후 전남 신안과 영광 일대의 해상풍력·태양광 발전 단지를 시찰했다. 이를 두고 산업계에서는 반도체 산업이 요구하는 전력 특성과 정부의 신재생 중심 정책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 “정책 쇼 아닌 진짜” 강조… 실행력 검증 과제

이 대통령은 이번 호남 반도체 투자와 관련해 직접 총괄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다. 그는 “정책 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겠다”며 규제 완화와 재정·세제 지원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특별법 제정과 추가 예산 편성 가능성을 언급하며 정부 구상에 힘을 실었다. 한병도 민주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필요하다면 예산을 추가 편성해서라도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대규모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는 정치적 선언만으로 완성될 수 없는 산업 인프라 사업이다. 전력 생산과 송전망 구축, 용수 확보, 부지 조성, 인허가, 지역 수용성, 기업 투자 판단 등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실제 가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에서도 전력 확보 문제로 데이터센터 건설이 지연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JP모건에 따르면 2027년 완공을 목표로 한 미국 내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의 60% 이상이 전력 공급 문제 등으로 아직 착공하지 못한 상태다. 글로벌 투자사 베세머 벤처 파트너스 역시 전 세계에서 발표된 신규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건설 규모는 190GW에 달하지만, 실제 가동 중인 용량은 12GW 수준에 그친다고 분석했다.

결국 이번 호남 반도체 투자 논란의 핵심은 지역 균형발전의 필요성 자체가 아니라, 정부가 산업 입지와 기업 투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전력 공급 대책과 실행 계획을 갖추고 있는지에 있다. 대통령이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강조한 만큼, 향후 구체적인 전력·용수 확보 방안과 실행력에 대한 검증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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