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가 국가 전략 자산으로 부상… 소버린AI 필요성 커져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인공지능(AI)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소버린AI 확보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AI가 산업 경쟁력뿐 아니라 국가 안보와 공공 시스템 운영에도 영향을 미치는 핵심 전략 자산으로 떠오르면서, 독자 AI 모델과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국가는 외부 기술 의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최근 소버린AI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국 AI를 갖지 못하면 결국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더 이상 다른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며, 수출 규제와 접근 제한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AI 주권 논의는 과거 데이터 주권이나 클라우드 인프라 확보 수준에 머물렀으나, 최근에는 AI의 핵심 두뇌 역할을 하는 파운데이션 모델을 독자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확대됐다. 자국의 공공·산업·국방·의료·연구 영역이 외산 AI 모델 접근 제한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같은 우려는 미국 정부의 조치로 더욱 커졌다. 미국 행정부는 지난 12일 국가 안보를 이유로 글로벌 AI 기업 앤트로픽의 최상위 AI 모델인 ‘미토스 5’와 ‘페이블 5’에 대한 모든 외국인 접근 중단을 지시했다. 앤트로픽은 이에 따라 두 모델의 해외 서비스를 즉시 차단했고, 동맹국인 한국도 예외 없이 접근이 제한됐다.
◈ 미국 AI 접근 제한에 각국 ‘AI 자립’ 전략 강화
이번 조치는 미국의 기술 통제가 기존 반도체와 장비 등 하드웨어 중심에서 AI 모델이라는 소프트웨어 영역으로 확장된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최상위 AI 모델 접근이 국가별로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세계 각국은 소버린AI 전략을 더욱 서두르는 분위기다.
유럽연합(EU)은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2000억 유로, 한화 약 300조 원 규모의 ‘인베스트 AI 이니셔티브’를 추진하고 있다. EU는 2027년까지 컴퓨터 연산 능력을 3배 이상 확대한다는 목표 아래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주요 회원국에 대규모 AI 기가팩토리 데이터센터를 조성하고 있다.
프랑스는 파리 근교에 GPU 기반 AI 캠퍼스 구축을 추진하고 있으며, 스페인은 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그린 데이터센터를 앞세우고 있다. 독일은 제조업과 자동차 산업 등 자국의 강점을 반영해 산업 AI에 특화된 데이터센터 구축을 유럽 고성능컴퓨팅 사업과 연계하고 있다.
EU의 전략은 단순한 데이터센터 확충에 그치지 않았다. 회원국에 분산된 데이터를 AI 개발에 활용하기 위한 데이터 통합 전략을 추진하고, ‘AI 법’을 통해 규제 주권까지 확보하겠다는 구상을 세웠다. 인프라 주권, 데이터 주권, 규제 주권을 함께 확보해 AI 시대의 독자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방향이다.
일본도 경제산업성이 주도하는 ‘제니악(GENIAC)’ 프로젝트를 통해 자국 AI 역량 확대에 나섰다. 일본은 자국 클라우드 기업에 보조금을 지원해 AI 가속기를 확보하고, 이를 스타트업과 대학에 공급하는 방식으로 독자 생태계를 키우고 있다. 총리가 직접 본부장을 맡는 ‘AI 전략본부’도 신설해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특화된 AI 모델 육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 한국,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과 국산 AI 반도체 동시 육성
한국도 정부 주도로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을 추진하며 소버린AI 기반 확보에 나섰다. 현재 SK텔레콤, 업스테이지, LG AI연구원, 모티프 등 주요 팀이 한국형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는 단계별 평가를 거쳐 2027년 최종 2개의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을 선정할 계획이다. 선정된 모델은 공공과 산업 현장 등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반 모델로 육성될 예정이다. 이는 단순히 한국어 성능이 뛰어난 AI 모델을 만드는 것을 넘어, 국가 핵심 분야에서 외산 AI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됐다.
최기영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한국도 최고 수준의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며 “워낙 빠르게 발전하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분야인 만큼 한시도 방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소버린AI 전략은 공공, 산업, 국방, 사이버보안 등 국가 핵심 영역에서 활용 가능한 독자 기반 모델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외산 AI 모델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더라도 주요 국가 시스템이 중단되지 않도록 안정적인 대응 체계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독자 AI 모델을 뒷받침할 국산 반도체 기반도 확대되고 있다. 정부가 예산을 투입해 신경망처리장치(NPU) 원천 기술 개발을 지원하면서 퓨리오사AI, 리벨리온, 딥엑스, 모빌린트 등 국내 AI 반도체 스타트업들이 양산 단계에 진입했다.
리벨리온과 퓨리오사AI는 국민성장 펀드 1·3호에 선정되며 각각 6400억 원과 80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확보했다. 딥엑스는 중국 바이두를 비롯해 전 세계 8개국으로 수출 활로를 넓혔고, 모빌린트는 일본 유니전자를 포함한 125개사에 제품을 공급하며 글로벌 고객 기반을 확대했다.
◈ ‘모두의 AI’와 피지컬AI로 활용 범위 확대
정부는 독자 AI 모델과 국산 AI 반도체를 결합해 AI 활용 영역을 국민 일상과 산업 현장으로 넓히겠다는 구상도 세웠다. 국민 누구나 AI 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모두의 AI’ 구상은 이 같은 흐름과 맞닿아 있다.
행정, 복지, 교육, 상담 등 생활 밀착형 분야에 독자 AI 모델을 적용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서비스를 확산하겠다는 취지다. 공공 서비스와 민간 산업 전반에서 한국형 AI를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이를 통해 국가 차원의 AI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피지컬AI 전략도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 AI가 제조 공장, 로봇, 의료, 국방 등 현실 세계의 기계와 시스템 안으로 들어갈수록 외산 모델과 플랫폼에만 의존하는 구조는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정부는 피지컬AI를 통해 산업 현장과 로봇 영역에서도 독자 AI 역량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배 부총리는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라며 “수출 규제와 접근 제한이 현실화됐다”고 말했다. 이어 “AI가 우리 삶과 산업에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상황에서 주도권을 갖지 못하면 강대국들이 하는 일에 뒤쫓아가기도 버거운 상황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 과제는 ‘보유’ 넘어 ‘끊겨도 작동하는 AI’
전문가들은 한국형 소버린AI의 과제가 독자 모델 확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 외산 AI 접근이 제한되더라도 공공, 국방, 의료, 연구, 행정 등 국가 핵심 영역이 실제로 멈추지 않도록 운영 가능한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상엽 KAIST 특훈교수는 “외부 의존 없이 운영 가능한 AI 역량은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며 “미국 등의 AI 주도국에서 사용 통제가 들어와도 국방, 의료, 연구, 행정 등에 필요한 모델은 해외 접속이 끊겨도 잘 돌아가게 구축해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모델 성능 경쟁뿐 아니라 데이터, 보안, 제도 설계가 함께 추진돼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김남국 울산의대·서울아산병원 교수는 국내 소버린AI 전략이 원천기술 구축에만 집중해서는 안 되며, 응용기술과 데이터, 인프라, 제도 지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경쟁력 있는 빅데이터 발굴, 데이터 활용과 보상 체계, AI 인프라 투자, 연관 기술의 초격차 유지가 함께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한국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지도 중요한 과제로 꼽혔다. 한국형 소버린AI가 모든 기술을 국내에서 직접 해결하는 폐쇄적 자급자족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핵심 기술과 인프라에 대한 안정적 접근권을 확보하되, 한국이 강점을 가진 영역에서는 다른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수준의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레고리 앨런 디시전트리리서치 대표는 한국의 소버린AI 전략이 모든 기술을 자체 개발하는 방식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AI를 모두 직접 만들려고 하기보다 글로벌 공급망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독자 모델과 핵심 인프라는 확보하되, 한국이 강점을 가진 분야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AI 기술이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의 핵심 변수로 떠오르면서 소버린AI 확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한국은 독자 AI 모델과 국산 AI 반도체, 공공·산업 적용 체계를 함께 구축하며 외부 접근 제한에도 흔들리지 않는 K-AI 생태계 조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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