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담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북미 정상외교가 한반도 정세의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대화 재개가 한반도 안보에 미칠 영향을 둘러싼 우려도 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19일(현지 시간) 연내 김 위원장과 회담할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회담이 성사되면 두 사람은 2018년 싱가포르와 2019년 하노이, 판문점 회동에 이어 네 번째로 마주하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매우 강력한 핵무기 57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량을 구체적인 숫자로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지만, 해당 수치의 산정 근거나 정보 출처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는 김 위원장과 “매우 잘 지내고 있다”며 개인적 관계를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북한과 대화를 재개할 경우 목표가 비핵화인지를 묻는 질문에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며 답변을 피했다. 정상회담 의지는 드러냈지만 협상의 핵심 목표는 밝히지 않은 것이다.
◈ 11월 중국 선전 APEC 계기 회동 가능성
외신들은 오는 11월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전후해 북미 정상회담이 추진될 가능성에 주목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복수의 미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이르면 올가을 김 위원장과 대면 회담을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다음 아시아 순방이 선전 APEC 정상회의와 맞물릴 가능성이 있어 이를 계기로 별도의 회동이 마련될 수 있다는 관측이었다.
다만 북한은 APEC 회원국이 아니며 김 위원장이 다자 정상회의에 참석한 전례도 없다. 회담이 추진되더라도 김 위원장이 APEC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하기보다는 중국 내 다른 지역이나 제3국에서 별도 회동을 갖는 방안이 거론됐다.
백악관은 구체적인 북미 정상회담 계획을 공식 확인하지 않았으며 북한도 회담 개최에 합의했다는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와 미국 정부 내부의 검토 사실만 알려졌을 뿐 일정과 장소, 의제는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 북한도 개인적 친분 강조…공식 대화에는 신중
김 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 북한 노동당 총무부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북미 정상 간 소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좋은 기억과 감정을 갖고 있으며 “두 지도자의 관계는 여전히 훌륭하다”고 밝혔다.
이는 북미 간 공식 접촉이나 정상회담 추진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두 정상의 개인적 관계는 부정하지 않은 반응으로 풀이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제의를 수용한 것은 아니지만 향후 정상외교가 재개될 가능성까지 차단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현재의 협상 환경은 2018∼2019년과 크게 달라졌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미국의 제재 완화 범위를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합의 없이 끝났다. 이후 북한은 핵탄두와 탄도미사일 개발을 계속하며 대미 핵 위협 능력을 강화했다.
북러 군사협력도 과거보다 깊어졌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까지 현실화된 상황에서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를 제재 해제와 체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유일한 통로로 인식할지는 불투명했다. 오히려 핵무기 보유를 기정사실로 내세운 뒤 비핵화가 아닌 핵 군축이나 군비 통제 방식의 협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제기됐다.
◈ 비핵화 빠진 정상회담, 북한 핵 보유 굳힐 수도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직접 언급하면서도 비핵화 목표에 대한 답변을 피한 점은 향후 협상의 성격을 둘러싼 불확실성을 키웠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아니라 핵 위협 관리나 핵 동결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협상이 진행될 경우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능력을 협상 카드로 활용해 미국에 제재 완화와 군사적 양보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 성사 자체를 외교적 성과로 부각하면 북한이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를 내놓기 전에 미국의 양보가 먼저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미국의 중간선거 일정도 변수로 꼽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를 앞두고 외교적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11월 APEC 정상회의 이전인 9∼10월에 회담이 전격 추진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정상 간 만남이 충분한 실무 협상 없이 속도전으로 진행되면 비핵화의 정의와 단계별 상응 조치, 검증 방식 등 핵심 쟁점이 뒤로 밀릴 수 있다. 과거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도 포괄적인 합의는 나왔지만 구체적인 이행 절차를 마련하지 못했고, 이후 하노이 회담도 결렬됐다.
◈ 한미연합훈련 축소가 남긴 안보 변수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발언에서 한미연합훈련 축소를 지시한 배경도 설명했다. 그는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재임하는 동안에는 북한과 관련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과의 개인적 관계를 한반도 긴장 억제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있음을 다시 드러낸 발언이었다.
그러나 정상 간 친분과 군사적 억지력은 성격이 다르다는 점에서 한미연합훈련 축소가 장기화할 경우 대비 태세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북한이 핵·미사일 능력을 강화한 상황에서 상응하는 비핵화 조치 없이 훈련을 먼저 축소하면 협상력의 불균형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였다.
북한은 향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경우 한미연합훈련의 장기 중단과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축소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주한미군의 규모와 역할,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문제까지 협상과 연계될 수 있다는 관측도 있지만, 현재 이러한 사안이 북미 간 공식 의제로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 트럼프의 동맹 인식도 주목
트럼프 대통령이 같은 자리에서 호르무즈 해협 문제와 관련해 한국에 불만을 표시한 점도 주목됐다. 그는 한국이 호르무즈 해협 문제에서 미국을 돕는 데 관심이 없다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 같은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문제를 안보뿐만 아니라 비용과 기여의 관점에서도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됐다. 북미 정상회담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한미연합훈련이나 주한미군 문제가 다른 외교·안보 현안과 함께 다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었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북미 대화 재개와 한반도 긴장 완화를 지지해 왔다. 이재명 대통령도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의 ‘피스메이커’ 역할을 맡는다면 자신은 이를 지원하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북미 정상회담은 교착 상태에 놓인 대화를 다시 열고 군사적 긴장을 낮추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과 충분한 협의 없이 한미연합훈련 축소나 대북 군사 억지력 조정이 먼저 이뤄질 경우 한반도 안보 구조가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 대화 재개 앞서 한미 간 의제 조율 필요
북미 정상회담이 구체화하면 한국 정부는 회담 개최 자체보다 어떤 의제가 어떤 순서로 논의되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북한 비핵화가 협상의 최종 목표로 유지되는지, 북한의 핵 동결과 제재 완화가 어떤 조건으로 교환되는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한미연합훈련과 미국 전략자산 전개, 주한미군의 규모와 역할 등 한국 안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서도 한미 간 사전 조율이 필요했다. 한국이 협상 과정에서 소외될 경우 북미 관계 개선과 한국의 안보 이익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북미 정상 간 대화는 한반도 위기를 완화할 수 있는 외교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용인하거나 한미동맹의 억지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일시적인 긴장 완화와 달리 장기적인 안보 불안을 키울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내 회담 발언으로 북미 정상외교의 문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관건은 두 정상의 만남 자체가 아니라 비핵화와 한반도 안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합의를 마련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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