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민’이라는 호명의 기만성과 구조적 모순

안승오 교수
안승오 영남신대 선교신학 교수

북한의 공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가장 빈번하게 오용되는 단어는 단연 ‘인민(People)’이다. 북한 정권은 국가의 모든 권력이 인민에게서 나오며, 자신들은 인민을 섬기는 머슴에 불과하다고 선전해 왔다. 북한의 헌법 제4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군인, 근로 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에게 있다. 근로인민은 자기의 대표기관인 최고인민회의와 지방 각급 인민회의를 통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수사학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북한 체제만큼 인민이라는 개념을 철저하게 도구화하고 유린한 정권은 역사상 찾아보기 드물다.

북한 체제에서 ‘인민’은 국가의 주권자가 아닌, 수령의 절대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가상의 주체이자 통치 대상에 불과하다. 정권은 인민을 ‘국가의 주인’으로 호명하지만, 정작 현실의 인민은 아무런 신체적·정치적 자유도 누리지 못한 채 체제 유지를 위한 무상 노동력으로 부려지는 ‘현대판 노예’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 북한 정권이 ‘인민’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왜곡하여 대중을 기만해 왔는지, 그리고 성분 제도와 강제 노동, 경제적 방임을 통해 인민의 삶을 어떻게 파탄 냈는지 그 수난의 역사를 살펴보자.

2. 신분제 사회의 부활: ‘성분’으로 쪼개진 가짜 인민

북한 정권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불평등을 비판하며 ‘모든 인민이 평등한 사회’를 표방했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구축한 것은 조선시대의 골품제나 봉건적 신분제를 능가하는 극단적인 계급 사회였다. 북한 정권은 1950년대 후반부터 주민들의 출신 성분과 사상을 기준으로 전 주민을 분류하는 ‘주민성분조사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이른바 ‘토대(土臺)’로 불리는 이 성분 제도는 북한 주민들을 크게 세 가지 부류, 즉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56개 부류로 분류하고 별도로 25개 성분으로 구분했다.

[북한의 3대 계층 구조]
├── 핵심계층 (약 25-30%): 혁명가 유가족, 당 간부, 군인 가족 등 (혜택 독점)
├── 동요계층 (약 50-60%): 일반 근로자, 기술자, 소상인 출신 등 (상시 감시 및 통제)
└── 적대계층 (약 15-20%): 지주, 자본가, 종교인, 월남 유가족 등 (차별과 탄압)

이 분류는 단순한 행정적 구분을 넘어, 한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족쇄로 작용한다. 핵심계층은 평양 거주권, 양질의 배급, 고등 교육 및 당 간부 등용의 기회를 독점하는 반면, 적대계층으로 분류된 인민들은 대학 진학이 원천 봉쇄되고 광산이나 오지의 위험한 노동 현장으로 강제 배치된다.

이처럼 북한이 외치는 ‘인민’은 전체 주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정권에 무조건 복종하는 가상의 집단만을 ‘인민’으로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사상적 이탈 징후가 보이거나 출신 성분이 나쁜 이들은 ‘인민의 원수’이자 ‘불순분자’로 규정하여 철저히 배제한다. 결국 ‘인민의 공화국’이라는 구호는 소수의 핵심 특권층이 다수의 주민을 합법적으로 차별하고 착취하기 위해 고안된 거대한 신분제적 기만술에 불과하다.

3. 사회주의 노동의 실상: 무상 노동과 국가적 수탈 시스템

북한 체제에서 노동은 헌법상 ‘인민의 신성한 의무이자 영예’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노동은 영예가 아니라, 아무런 대가도 지급되지 않는 잔혹한 국가적 착취 메커니즘이다. 1990년대 배급제가 완전히 붕괴된 이후에도 북한 정권은 주민들을 직장에 강제로 출근시키며 노동력을 수탈하고 있다. 직장에서 지급하는 공식 월급은 장마당 물가를 고려할 때 쌀 1~2kg조차 살 수 없는 무의미한 액수에 불과하지만, 출근하지 않을 경우 사상투쟁의 대상이 되거나 노동단련대로 끌려가기 때문에 인민들은 ‘살기 위해 무상으로 일하는’ 모순적 상황에 처해 있다.

국가적 규모의 대건설 사업이 있을 때마다 자행되는 ‘속도전’은 인민을 노예처럼 부리는 대표적인 수단이다. ‘천리마운동’, ‘만리마운동’, 그리고 최근의 살림집 건설에 이르기까지 정권은 수시로 기한을 정해놓고 노동력을 쥐어짜낸다. 북한 정권은 국가 재정이 고갈될 때마다 주민들의 자발적 충성심을 강요하는 전 민족적 노동 동원 체제를 가동하여 경제적 위기를 모면해 왔다.

특히 청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돌격대’는 현대판 강제 징용과 다름없다. 군대에 준하는 엄격한 규율 속에 편제되는 돌격대원들은 제대로 된 안전장비나 식사도 공급받지 못한 채 도로, 철도, 발전소 건설 현장에 투입되어 혹사당한다. 인민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 건설한다는 건축물들이, 정작 그 인민들의 피와 땀, 심지어 목숨을 갈아 넣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인민공화국’이 가진 가장 잔인한 역설 중 하나다.

4. 고난의 행군과 방임: 주인을 굶겨 죽인 공화국

북한 정권이 인민을 대하는 태도의 본질이 가장 가혹하게 드러난 사건은 1990년대 중후반의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정권의 정책 실패가 겹치면서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인민들이 굶어 죽어갈 때, 정권이 취한 조치는 인민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증언에 의하면, 수많은 주민이 아사하는 와중에도 김정일 정권은 막대한 국가 예산을 김일성의 시신을 안치할 ‘금수산기념궁전’ 성역화 작업과 핵·미사일 개발에 탕진했다. 당시 금수산기념궁전 개축에 들어간 비용은 수억 달러로 추정되는데, 이 자금이면 국제 시장에서 수백만 톤의 곡물을 구입해 아사 사태를 완전히 막을 수 있었던 액수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 자원 배분의 왜곡]

국가 가용 재정

[특권층 및 체제 유지]
- 금수산기념궁전 성역화(수억 달러)
- 핵·미사일 및 군비 증강
(재정 최우선 배정)

[일반 인민 구제]
- 식량 배급 전면 중단
- 각자도생(장마당) 방임
(사실상의 국가적 방치)

위의 표는 인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자원 배분의 왜곡을 잘 보여준다. 국가가 식량 배급을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동의 자유와 장마당 상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해 통제함으로써 인민들의 자구책마저 가로막았다. 인민들은 국가로부터 버림받았고,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장마당’이라는 자본주의적 틈새를 개척해야만 했다. 오늘날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하는 것은, 정권이 인민을 주인이 아닌 필요에 따라 언제든 대체하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으로 취급해 왔음을 증명하는 가장 명백한 방증이다.

5. 이름뿐인 인민의 나라를 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은 북한 주민들에게 있어 거대한 기만이자 폭력의 이정표이다. 정권은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민’이라는 단어를 모든 기관과 법률, 구호의 전면에 내세웠다.人民군, 人民병원, 人民학교, 人民문화궁전 등 북한의 모든 공간은 인민의 이름을 빌려 존재한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인민이라는 호명은 주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국가를 위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희생을 이끌어내기 위한 마취제에 불과했다. 성분 제도로 인민을 쪼개어 차별하고, 속도전과 강제 동원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며, 체제 위기 앞에서는 식량조차 공급하지 않고 방임했던 정권의 역사는 이 나라가 ‘인민의 나라’가 아닌 ‘수령 일가를 위한 사유지’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결국 북한 체제에서 인민의 수난사는 언어의 타락이 어떻게 한 사회를 노예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다. 북한의 인민들이 진정한 주권을 회복하고 ‘주인으로 호명되는 가짜 삶’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누리는 진짜 삶’을 찾을 때, 비로소 북한 국호에 새겨진 거대한 기만의 역사도 종식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가장 큰 민족적 과제는 이 기만 속에서 노예의 삶을 사는 우리 2500만 동포를 속히 벗어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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