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존스 3세의 기고글인 '정치에 대한 당신의 분노, 혹시 영적 문제는 아닐까?'(Is your political rage a spiritual problem?)를 7월 1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데이비드 존스 3세는 『올리버 앳킨슨의 뜻밖의 삶: 미국 건국에 관한 소설』의 저자다. 그는 이야기 작가이자 에세이스트, 강연자로 활동하며 미국의 건국과 신앙, 역사, 문화,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스튜디오의 조명이 눈부시게 빛난다. 두 패널은 책상 너머로 몸을 기울인 채 상대방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서로의 말을 가로챈다. 진행자는 이미 통제력을 잃었다.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책상 너머로 삿대질이 오간다. 누군가 날카로운 말로 상대를 공격할 때마다 방청객들은 환호한다.
방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언쟁을 담은 영상들이 소셜미디어를 휩쓴다. 영상에는 누가 누구를 ‘박살 냈는지’ 자축하는 자극적인 제목이 붙는다.
몇 분 뒤에는 또 다른 팟캐스트가 시작된다. 유튜브에서는 새로운 논쟁이 벌어지고, 페이스북에서는 또 다른 말다툼이 이어진다. 한 기독교인 정치인이 상대방을 맹렬히 비난한다. 우리 편을 응원하고 상대편을 경멸할 또 하나의 기회가 열린 것이다.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수백만 명이 이를 지켜보고 박수를 보내며 분노의 합창에 동참한다.
그러나 그 순간 성경은 우리 모두가 외면하기 어려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대사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수행하기를 원하신 방식인가?’
예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일주일 동안 우리의 공적인 대화를 지켜본다면, 과연 우리가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그분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것이 정말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사용해야 할 언어와 보여야 할 태도인가.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적대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문화로부터 도피하거나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라고 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거의 혁명적으로 들리는 지침을 디모데에게 전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디모데후서 2:24-25)
바울이 하지 않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모든 논쟁에서 승리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비아냥과 분노의 기술을 익히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친절과 인내, 온유함으로 진리를 전하라고 권면했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실제 삶을 통해 이를 보여주었다.
바울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신을 위한 신전과 조각상, 제단으로 가득한 아테네에서 그 모습을 몸소 보여주었다. 한 제단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바울은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먼저 그들을 관찰했다. 회개를 촉구하기 전에 그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이해하려 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조롱했고, 어떤 이들은 더 듣기를 원했으며, 소수는 믿음을 받아들였다. 바울은 박수갈채나 대중의 반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함으로 자신의 사역을 평가했다.
에베소에서 복음은 개인적인 믿음의 차원을 넘어 도시의 문화와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아르테미스 신전 모형을 만들던 은장색들은 고객이 줄어드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두려움은 믿음보다 빠르게 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의 거대한 원형극장은 수많은 군중이 외치는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는 함성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교회는 분노를 분노로 갚지 않았다. 복음이 도시 전체의 문화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인들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신약성경은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단지 미래에 등장할 한 인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권위보다 인간의 권위를 높이며 타락한 세상에 거짓 소망을 제시하는 현재적인 영적 실재이기도 하다.
기독교인들은 정치와 문화, 거짓 종교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가 중심에서 밀려나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이러한 영향력을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영적 기만을 분별하는 것은 싸움의 절반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과연 영적인 무기로 이 영적 싸움을 치르고 있는가?’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다. 우리의 이웃은 적이 아니다. 정치적 반대자도 적이 아니다. 온라인에서 우리와 논쟁하는 사람 역시 진정한 적이 아니다.
모든 기만의 배후에는 분노와 경멸, 더 큰 목소리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영적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교회에 이 싸움에 필요한 무기를 주셨다. 진리와 의, 평안의 복음, 믿음과 구원,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다.
이 무기들은 오늘날에도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왕께 그들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우리와 맞서는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꾼다. 그들은 단순한 반대자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선교지다.
그리스도를 거스르고 복음을 조롱하며 거짓된 소망을 붙드는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다.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이념 때문에 마음 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진리를 대적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우리는 과연 사랑하기 쉬운 사람이었는가? 하나님의 해방하는 은혜가 없었다면 모든 신자도 한때 그들과 같은 영적 눈멂 속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뛰어난 이성적 추론이나 도덕적 우월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셨고, 회개할 마음을 허락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을 주셨을 뿐이다.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겸손과 소망을 동시에 준다. 우리는 자신이 과거에 어떤 존재였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다른 이들을 구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뼈아픈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의 마음을 복음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을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반응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품을 신실하게 반영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이 영적 전쟁터는 트로이 전쟁이나 나폴레옹의 깃발 아래 벌어진 전투, 혹은 이오지마 해변의 참혹한 전투와는 다르다. 그런 물리적 충돌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무기와 군대를 통해 치러졌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우리가 광장에 나서기 훨씬 전, 무릎을 꿇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이 싸움은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통해 전진한다.
그렇기에 성령의 열매는 영적 전쟁을 대신하는 나약한 차선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적 전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인내하는 것, 원수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이웃을 관대하게 대하는 것, 죄를 지었을 때 자백하는 것,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 그리스도를 끝까지 신실하게 따르는 것. 이 모든 삶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2:12)
우리의 삶은 복음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결코 복음을 흐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진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변호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선포하는 분의 아름다움과 겸손, 용기와 은혜를 보여주는 삶으로 그 진리를 빛나게 해야 한다.
세상은 누가 가장 크게 소리쳤는지, 최근 논쟁에서 누가 이겼는지, 누가 더 교묘하게 상대방의 허점을 찔렀는지를 기준으로 승리를 판단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기준은 다르다. 복음을 아무리 신실하고 사랑스럽게 전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진리를 거부할 것이다. 예수님도 이미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르심은 대중적인 인기나 즉각적인 성과에 있지 않다.
우리의 부르심은 언제나 신실함에 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호전적으로 다투거나 헐뜯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서도 믿음을 위해 치열하게 분투할 수 있다.
우리는 어둠을 어둠으로 갚기를 거부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을 대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조롱할 것이다. 누군가는 등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누군가는 믿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나라가 일해온 방식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분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