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한평우 목사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신기한 일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신앙을 위해 모진 고난과 핍박을 견디었는데, 정작 핍박이 사라지고 자유가 선포되자 급격하게 신앙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이다.

토리노의 토레 펠리체(Torre Pellice)에는 왈도파 신도들이 신앙을 파수하기 위한 눈물겨운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프랑스 리용에서 핍박을 피해 그 높은 알프스 산을 넘어 피에몬테(Piemonte)로 이주했다. 가톨릭 당국은 해발 7백 미터 위로 올라가 거주하라고 하여 60도 이상의 경사진 알프스로 올라가 거주하였다. 그들이 기거하면서 운영했던 신학교, 주일학교 처소, 여전도회 장소, 숨어서 예배드렸던 바위 동굴 등등이 생생하게 지금도 남아 있다. 때로는 이들을 말살하려고 스페인 용병들을 보내, 길을 막고 닥치는 대로 (전향하지 않는 자들)살육하여 강물을 붉게 피로 물들이기도 했다.

통계로는 약 2백만이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옹골차게 신앙을 시켜냈는데, 1860년 이탈리아가 통일되고 신앙의 자유가 선포된 후 160년이 지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차별금지법이나 동성애를 가감 없이 받아들임으로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역시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자, 열악한 환경이었던 지하 카타콤베에서 나올 수 있었고, 너나없이 관료들을 위시하여 전 국민들이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황제가 기독교를 용인하자 세상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관료들이 너도나도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덩달아 시민들도 변화에 호응했다.

터키의 교회 유적을 보면, 한꺼번에 밀려오는 엄청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했다. 그래서 만든 곳이 가운데 사람들이 지나가도록 낮은 통로를 만들었고, 양쪽에 단을 만들어 빗자루 같은 도구로 물을 적셔 그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했다. 참 회개의 증거 없이 행한 약식 세례이었다. 그런 사람들로 교회는 가득했지만, 생명력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그때부터 교회는 본격적으로 신학 논쟁에 휘몰리게 되었다. 신학의 문제로 일어났던 것이 기독론으로,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논쟁이었다. 이런 논쟁의 리더는 아리우스(Arius,AD 256-336)로 그를 정통 파에서는 가라지, 독사 같은 자로 악평했으나, 그의 조력자들에 의하면 인품과 풍모는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그가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릴 수 있었던 점이 있었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바우 칼리스 교회를 맡았던 사제로, 청빈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거칠고 소박한 옷을 입었고 당시 민중들에게 깊은 도덕적 신뢰를 주었다. 또한 당대 최고의 교육 기관이었던 안디옥 학파의 루키아누스 문하에서 수학했다. 논리적이고 명석한 두뇌, 복잡한 신학적 개념을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데 탁월했다.

철저하게 성경에 기반을 두고 논리를 전개하였기에 많은 지식인과 동료 성직자(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등)들이 그를 지지했다. 수려하고 큰 키, 위엄있는 외모를 가졌고, 정중하고 매력적인 매너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타협을 모르는 인물이었기에 신학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면으로 맞섰고, 파면과 유배를 당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인물이었기에 로마제국을 단숨에 뒤흔들 만큼의 강력한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대체로 교회 역사에서 일어난 이단은 지식적으로 탁월했고, 인품도 훌륭하여 외적인 면에서 매력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사탄은 이런 자들을 미혹하여 사람들을 현혹했다. 그래서 파급효과가 대단했다.

그의 주장은, △그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시간적 시초) △성자는 신이지만 피조물 중 으뜸일 뿐이다 △성부와 성자는 유사한 본질이다-동일 본질(Homoousios) 개념을 거부 △예수는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기에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가변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단이 큰 세력화로 격렬하게 투쟁하자 콘스탄틴 대제는 쉽게 생각했다. 혼란스럽던 제국을 통일했는데 이런 정도는 간단할 줄로 여겼다. 그래서 전 로마의 주교들을 니케야로 불렀다.

당시 참석했던 각 지역 대표들의 형색은 기괴할 정도로 이상했다고 전해진다. 한쪽 눈이 뽑힌 사람도 있었고,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었고, 고문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로마 황제의 핍박을 견딘 분들이었다.

그 논쟁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번째 피조물일 뿐 본질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질이 아니라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대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하다(Homoousius)고 주장한 아타나시우스의 의견에 대표자들은 찬성했다(325년 1차, 니케야 회의). 여기서 중요한 삼위일체 교리(신인 양성론)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지만, 개인적으로나 음성적으로 아리우스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일은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이해되거나 믿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회의를 개최하고 보니 이것이 만만치 않은 일임을 콘스탄틴 대제는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동로마에서는 아리우스를 좇는 사람들이 많았고, 황제도 그들과 가깝게 교제하고 있었다.

콘스탄틴 대제
콘스탄틴 대제가 세례를 받은 통

콘스탄틴 대제는 337년에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이즈밀에서 337년, 5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 병을 고치기 위해 헬레노 폴리스의 온천에 갔으나 차도가 없었다.

죽음을 직감하고, 니코메디아 근처 아키로나의 궁전에 머물렀다. 평생 기독교를 지지하였으나 정작 세례는 받지 않았다. 니코메디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에게 임종 세례를 받았다. 자신이 니케야 회의에서 아리우스가 이단이라고 선포했는데, 아리우스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주교에게 죽기 직전 세례를 받은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개인적 친분 때문이었다. 그는 생전에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런 부분이 그를 괴롭혔기 때문에 죽음 직전에야 세례받았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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