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오래된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상대를 밀어내며 나만 살아남으려는 길, 상극(相剋)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를 살리며 함께 살아가려는 길, 상생(相生)이다. 이 두 개념은 단순한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방향을 가르는 근본적 기준이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세계의 위기는 결국 이 두 가치관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상극은 갈등과 배제를 전제로 한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경쟁은 극대화되며, 타자는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위험으로 간주된다. 자국의 이익을 절대화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패권주의는 이러한 상극의 전형적 얼굴이다. 반면 상생은 공존과 연대를 토대로 한다.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신뢰, 그리고 그 신뢰를 제도와 문화로 구현하려는 의지가 상생의 본질이다.
역사는 이 두 길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갈라져 왔다. 상극의 극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드러났다. 인간을 수단화하고 타자를 배제한 결과, 세계는 전례 없는 파괴와 비극을 경험했다. 반대로 상생의 가능성은 전후 유럽에서 실험되었다. 오랜 적대 관계에 있던 국가들이 경제와 제도를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의 대륙은 협력의 공동체로 변모했다. 상극이 파국을 낳는다면, 상생은 평화를 낳는다는 사실을 역사는 분명히 증언한다.
문명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남긴 사상가들 또한 같은 경고를 반복해왔다.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보았고, 아놀드 토인비는 문명의 붕괴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이들의 통찰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음에도 하나의 진실을 향한다. 상극은 자기파괴적이라는 사실이다.
오늘의 국제질서는 다시 상극의 기울기로 미끄러지고 있다. 중동에서의 군사적 충돌, 동유럽의 장기화된 전쟁, 아시아에서 고조되는 긴장은 모두 힘의 균형을 둘러싼 불신에서 비롯된다. ‘안보’라는 이름 아래 각국은 군비를 확장하고, 상대의 방어를 위협으로 해석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여기에 민족주의와 경제적 이해관계가 결합되면서, 국제 규범과 협력의 기반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그 결과는 분명하다. 전쟁은 확산되고, 경제는 불안정해지며, 가장 약한 이들이 가장 먼저 희생된다.
문제는 이러한 상극의 구조가 더 이상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의 전쟁은 곧바로 에너지, 식량, 금융의 위기로 확산되며 세계 전체를 흔든다. 상극은 이제 국경 안에 머물지 않고, 인류 공동의 삶을 위협하는 구조적 위험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상생은 더 이상 이상적 구호가 아니라, 현실적 생존 전략이다. 무엇보다 배타적 안보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협력적 안보 체제를 복원해야 한다. 상대를 억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안전해지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시에 경제적 상호의존을 확대해야 한다. 국가 간 연결이 깊어질수록 전쟁의 비용은 커지고 평화의 유인은 강화된다.
마지막으로, 문화적·윤리적 공감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전쟁은 타자를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시작되기 때문이다. 교육과 종교, 문화는 다시 인간을 이해하는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아르테미스2호 우주인 홍일점 여성 우주인의 인터뷰에서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우주를 유영하는 구명보트와 같았다.” 라고 했다. 그 의미는 지구촌 모든 인류는 지구를 사랑하고 공존을 위해 상생해야한다는 뜻을 암시했다. 상생만이 우주에서 지구가 살아남는 길이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