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이민의 진화』
신간 『이민의 진화』

일제강점기 말기, 기록조차 희미한 시대에 호주로 건너간 한 청년이 있었다. ‘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그는 현재까지 확인된 최초의 한인 이민자로 평가된다. 이후 호주 장로교의 지원을 받아 멜버른대학교에서 수학한 첫 한국인 유학생 김호열이 뒤를 이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타국으로 떠나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어려웠던 시절, 이들이 왜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선택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신간 『이민의 진화』(푸른숲 출간)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호주국립대 송지영 교수는 오랜 현장 연구를 바탕으로 최초의 한인 이민자부터 한국 전쟁·베트남 전쟁 시기의 이주자, 그리고 오늘날 워킹홀리데이로 호주를 찾는 청년 세대까지 100년에 걸친 호주 이민사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했다. 책은 단순한 사례 모음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과 개인의 선택이 어떻게 교차하며 ‘이민’이라는 결정을 이끌어내는지를 깊이 있게 담아냈다.

송 교수는 호주 로위연구소 이민정책실장을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배경의 한국 이민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청년, 이민 1세대, 전쟁 직후 결혼으로 호주에 정착한 사람들, 생계를 위해 떠난 세대까지 폭넓은 이야기가 담겼다. 그들의 삶은 생존·전쟁·교육·기회의 문제뿐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까지 함께 드러낸다.

책 속에 소개된 조영옥 씨의 사례는 당시 이민 현실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는 전쟁 직후 호주 군인과 결혼한 뒤 남편이 먼저 귀국해 몇 년 동안 편지로만 연락을 이어갔다. 배우자 비자를 받아 도착한 곳은 도심에서 몇 시간이나 떨어진 내륙의 작은 마을로, 당시 아시아인이 한 명도 없던 공간이었다. 언어도, 문화도, 주변 환경도 낯선 곳에서 시작해야 했던 삶은 이민이 어떤 무게를 지닌 선택인지를 보여준다.

2000년대 이후 청년들의 이민은 훨씬 더 다층적으로 변화했다. 한국 직장 문화의 한계 속에서 능력을 키워 호주 취업을 선택한 혜린의 사례, 호주 내 인종 및 성차별 문제로 인해 귀국을 택한 로제의 경험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배경·역량·경험·관계·환경 인식 등 복합적 요인이 이민 결정에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책은 이러한 흐름을 총 6개의 장으로 묶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정리한다. 19세기 말 조선 후기의 이주, 전쟁·독재·가난을 피하기 위한 ‘생존형 이주’, 교육과 자녀의 미래를 위한 이주가 늘어난 시기, 그리고 오늘날 삶의 질·환경·자기다움 등을 중심에 둔 ‘웰빙 이민’의 시대까지 한국인의 호주 이민사를 폭넓게 담아냈다.

특히 세계여행 자유화, 워킹홀리데이 제도 확대 등 제도적 변화가 이민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하며, 이민의 동기가 ‘생존’에서 ‘삶의 가치’로 이동한 배경을 짚는다. 과거에는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건강하게’, ‘나답게’, ‘원하는 환경에서’ 살기 위한 선택으로 변화해 왔다는 흐름을 제시한다.

송 교수는 “어떤 사회가 더 발전할지를 알고 싶다면 그 사회의 청년들이 어떤 현실에 놓여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민의 진화』는 단순히 한인 이민의 역사를 다루는 책을 넘어, 세계화 속에서 한국 사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지 묻는 작업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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