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나를 초청한 친구 총장 교회에서 설교하는 날이었다. 교회가 숙소에서 40분 정도 떨어져 있기에 주인 장로님이 라이드 해주시고 거기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살리나스 장로교회’에서 설교를 마친 후 1시간 반 거리인 산호제에 와서 한국 식당에 들어가서 갈비탕을 먹었다. 외국 와서도 양식보다는 한식을 더 선호하는 내 입맛엔 변함이 없는 듯하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총장 사모님이 성경에 관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건 알지만, 사라에게는 직접 그런 약속을 하신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라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 몸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에 자기가 아닌 첩 하갈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아들을 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사라가 남편에게 하갈을 첩으로 줘서 이스마엘을 낳게 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부족이라고 비판을 많이 하는데, 그건 잘못된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꽤 일리 있고 똑똑한 물음이었다. 사모님의 얘기가 옳다면, 사라가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의 씨를 얻으려 했던 것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 약속 자체를 부정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통한 아들의 출산을 부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이 “때가 차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3)고 직접 고지하신 일은 이미 하갈을 첩으로 주어 이스마엘을 얻은 사건(창 16:4)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첫 아들인 이스마엘을 얻기 전까지는 약속의 아들이 사라 자신의 몸에서 태어나리라고 하나님이 공식적으로 말씀해 주신 적이 없다’라는 얘기가 맞아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사라를 통해서임을 보여주는 구절이 하나 있다. 창 12장은 아브라함이 기근이 들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 못하고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버린 사건의 내용이다. 사라가 인물이 출중한 것을 본 애굽의 바로왕이 자기 여자로 삼으려고 아브라함과 대화한 후 데려가 버렸다. 그냥 내버려두면 사라는 바로왕의 첩이든 아내가 되고 마는 위기의 순간이다. 이때 하나님이 바로왕이 사라를 취하려고 데려간 일로 인해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다(창 12:17).

무엇 때문에 재앙을 내리셨다고 하는가? ‘사라의 일로' 인해서이다. 그래서 바로왕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어찌하여 아내라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원망하면서 사라를 내어준다.

그럼 어째서 하나님이 사라의 일로 바로에게 진노하셔서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단 말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 것은 다른 여인이 아닌 그의 정실 아내인 사라를 통해서 였다는 의중을 명백히 보여주시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사라가 자기 몸이 아닌 첩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서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통해서 자식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몸 상태로는 자식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하갈을 남편에게 준 것으로 봐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라가 자신이 아닌 하갈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자식을 주실 수 있는 것으로 오해했다고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녀의 불신 때문에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준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우리는 사래의 이 불신의 행위를 ‘믿음 없음’으로 쉽게 평가하고 비평해버려선 안 될 것이다. 사라가 자신의 현실, 즉 이미 경수가 끊긴 몸이라는 생물학적 불가능성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의 생각대로 처리하려 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적인 판단과 계산 속에서 그녀는 하나님의 계획을 앞당기거나 자기 생각으로 그것을 이루려는 선택을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시간에 대한 기다림의 실패인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이 지나 마침내 사라에게도 직접 말씀하신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애초부터 사라를 포함한 것이었으며, 그녀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사라의 불신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가운데 하나님의 방식보다는 인간의 방식으로 그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준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그 약속에 자신이 포함된 것임을 안다고 해도 우리의 이성이나 인간적인 판단을 앞세운다면 사라의 전철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라에게 요구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집중하여 그분을 굳게 신뢰하고 인내로 기다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사라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복음적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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