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20세기 미국 윤리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4가지 교만에 대해서 말했다. 그 4가지는 권력의 교만(Pride of power), 지식의 교만( Pride of Knowledge), 도덕의 교만(Pride of Virtue),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적 교만(Pride of Spirit)이다. 니버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성품의 현상들을 보면서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교만이다. 성경에 나오는 보편적 죄의 개념은 아담의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을 말한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악한 일을 하게 되었고, 악의 결과로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고, 그 죄는 유전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악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죄 개념에 더하여 니버는 인간의 교만을 죄로 보았다. 불순종하려는 의지, 불순종한 그 자체를 교만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니버의 죄의 개념인 교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보다 인간 자신의 의지를 먼저 내 세우는 것이며, 더 큰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 또는 그 의지를 말한다.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된다는 사탄의 유혹에 미혹되어 신을 불순종한 것이기 떄문이다. 그런 행위를 유발하게 한 동인이 교만이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거역, 또는 인간의 교만을 그렇게 죄로 규정하였다.

여기서 관심가져야 할 것은 인간의 교만을 네 가지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인간 스스로 당위적 가치를 가진 것은 없다. 모두 교만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글에서 필자는 지적 교만(Pride of Knowledge)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지식의 교만이란 인간이 무엇에선가 지식을 자랑하는 것을 말한다. “본인이 ~~을 안다”, “누구보다 더 안다” 또는 “하나님이 아시는 것만큼 나도 안다”와 같은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하나님처럼 무한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와 같은 말이다. 구약의 바벨탑 사건을 예로 든다면 “인간이 하늘에 닿을 만큼 지식을 축적한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능력을 가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예들이 지식의 교만을 말하는 것이다.

지적 교만은 주로 글 꽤나 쓴다는 학자들 가운데서 흔히 볼 수 있다. 지적 교만이 보이는 글들은 몇가지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책 같은 경우 지나치게 많은 분량의 글을 쓴다. 예를들어 단순한 내용의 주제라도 늘리고 늘려 다른 사람들의 책보다 2,3배이상 분량의 글을 쓰는 것으로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는 경우이다. 책이 두꺼우면 그만치 그 부분에 실력이 있는 것처럼 독자들이 생각한다고 믿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헛점이 있다. 그것은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책 내용에서 깊이가 충실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쉽게 말하면 쓸데없는 글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신의 글을 자화자찬 하는 글을 쓴다. 같은 내용일지라도 자신 외의 것은 가치가 없다는 식의 글을 쓴다. 불필요한 미사려구로 위엄을 나타내기도 한다. 목이 곧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놀라운 것은 독자들은 신기하게도 이런 요량의 글을 잘 분간하고 파악하여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쓴이의 글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목적, 또는 의도를 알아 오히려 글을 폄하하기도 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글을 쓸때는 항상 겸손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리고 정직한 자세로 써야 한다. 함부로 역사적 인물이나 다른 학자들, 사상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셋째, 책 출간이 독자들에게 선한 의지를 전하거나 좋은 영향력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쓴다는 것이다. 행여나 잘 팔려 자신도 알리고, 나아가 수입이라도 기대해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쓴다는 말이다. 출판사 대부분은 책 내용의 수준이 아무리 높다해도 내용보다 먼저 책이 잘 팔릴 수 있는 글을 선별하여 책을 출판한다. 잘 판매되는 책을 내기 위해 저자는 재미 감정위주로 글을 쓰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진실성을 의심하게 된다.

넷째, 글 전체를 보면 시작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한 의도를 나타내 보이지만, 점차 저자 자신의 능력과 실력을 과시하는 쪽으로 쓴다. 최종적으로 자신을 먼저 내세우는 것으로 끝맺음한다. 시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지만, 끝은 항상 저자 자신이 주인으로 남아 있는 모습을 흔히 본다. 예수 이름 팔아 부자된 사람도 많고, 예수 이름 팔아 학자된 사례도 많다. 부끄러운 삶을 사는 사람, 목회자, 신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위의 몇몇 사례들은 지식의 교만이 가진 특성을 나타내고 있음을 말한다. 지식의 교만은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에 의해 제기된 주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교만성이 다분한 사례들과는 정 반대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 있다. 그는 다름 아닌 존 웨슬리였다.

존 웨슬리는 19명의 자녀를 둔 성공회 목회자 아들이다. 자녀들이 모두 학업에 탁월하여, 특히 웨슬리는 영국의 유서깊은 명문 옥스포드대학교를 아주 우수한 성적 곧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첫째, 그는 교만이 아닌 겸손의 인물이었다. 웨슬리는 매주 화요일 저녁에는 겸손에 관한 13가지 질문으로 ‘자기점검’을 하였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옥스포드대학교를 나왔으면서도 지식자랑을 한 경우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학교성적과 학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았다. 웨슬리는 복음운동가면서 신학자였는데, 그의 신학은 정말 신학을 위한 신학을 했다. 자신의 학벌, 학문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학문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서는 지적 겸손을 볼 수 있다.

둘째, 성결로 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복음운동에 열중했다. 그는 자신을 알리고 나타내기 위하여 집회를 하거나 설교를 하지 않았다. 오로지 성결한 존재가 되어 구원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복음전파의 열정만을 나타냈다. 메소디스트(Methodist)라는 이름처럼 복음운동에 열정을 가진 전도자로서 영적 교만과도 거리가 먼 전도자였다.

셋째, 복음전도자로서 진실한 삶을 살았다. 서구인들을 만나보면 첫 인상이 ‘꾸밈없음’이다.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생각하고 활동한다. 한국인들은 수백, 천년동안 눌린자 모습의 생활을 해 와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그런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꾸미는 삶을 산다. 집도 좋은 것, 없어도 최고급 외제 자동차로, 핸드백, 구두, 옷, 모두 과시적 모양을 하고 산다. 세속적인 말로 다 웃기는 일이다. 서구인들은 있으나 없으나 모두 평범한 모습으로 산다. 가식이 없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가진 것이나 배운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존 웨슬리는 오로지 순수, 진실, “온전한 그리스도인”(마 5:48)이 되고자 일평생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 곧 성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성령충만의 열정으로 말씀전하고, 말씀을 신학화 하였던 인물이었다.

신학을 학문화하는 태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생활도, 웨슬리처럼 경건하게, 성결하게 순수하게 해야 한다. 자신의 책과 글이 최고라 말하는 자는 이미 지적 교만에 빠져있는 자요, 진정한 웨슬리언 신학자가 아니다. 시끄럽거나 매끈한 그 무엇에는 항상 교만과 공허함이 함께 도사리고 있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것이든 교만은 하나님 잎에서 큰 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 후배들중에 웨슬리를 연구하고 그의 신학에 관한 책을 집필한 학자들이 등장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중에는 염려스러운 견해나 해석을 하는 학자가 있는 것 같다.

특별히 웨슬리신학 교재를 900쪽이 넘게 집필하면서 웨슬리가 기독자 완전을 포기한 것처럼 말하거나 후대학자들 중에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성취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극단주의자이거나 광신주의자라는 황당한 주장은 웨슬리신학을 벗어난 탈 웨슬리신학자요 성결교단 헌법을 무시하는 자가 아닐까 싶다.

진정한 웨슬리 신학자라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위대한 삶을 살았던 18세기 영국의 존 웨슬리를 롤모델로 삼는 겸손한 신학자 목회자로 웨슬리신학을 빛내는 웨슬리신학자가 되길 소망한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언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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