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고대, 즉 그리스나 로마시대의 학문은 주로 철학, 정치학, 법학, 논리학이나 수학 같은 것이었다. 학당이나 서당같은 작지만 체계를 갖추었다는 교육기관이 아니더라도, 즉 사적인 제자양성 과정에서도 학문은 주로 위에 언급한 그런 분야들을 중심으로 하여 가르쳐졌다. 그렇게 학문을 하는 이유, 또는 그 필요성은 몇몇 목적이 있다. 첫째, 진리탐구다. 학문은 인간과 자연만물에 대해 존재의 가치나 내용, 의미를 알고자 하는 것이 중심이다. 둘째, 학문을 하는 이유는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는 것으로 인간정신이나 삶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연구하지 않으면 수렵채취인 수준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인간은 학문을 발전시킴으로 오늘날과 같이 만물을 다스리며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그 증거다. 셋째, 학문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존재의 의미를 한층 더 알게 해주며, 책임의식으로 한 층 더 성숙한 인격성장은 물론 사회질서를 통해 행복하게 살도록 만든다.

신학은, 굳이 교육의 시초를 따지자면, 구약은 수천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1세기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제자 양성에서 시작한 것을 기초로 하여 그것이 학문성을 띤 분야로 나타난 것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고, 본격적으로 신학이라 불리울 수 있었던 것은 어거스틴부터라 할 수 있다. 로마가 제국주의로 지경을 넗혀가자 교회도 확산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적당한 신학적 논리나 규범이 필요로 하여 어거스틴은 바울 이후 최고의 지성인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들을 논리, 학문화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신학의 주요 요소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나아가 선, 악, 죄같은 형이상학적 내용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필요했는데, 이에 대한 대답으로 신학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신학은 몇몇 의미있는 학문적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일반학문이 제기하는 인간 존재의 의미, 즉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그러한 질문이나, 자연만물은 언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나, 우주와 역사운행을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에 가치가 있다. 일반 학문은 한계성을 가진 인간들이 하는 것이라 어디서든 의심과 질문앞에 해결 할 수 없는 높은 담에 마주쳐야 하는 운명적 상황에 있는 반면, 신학은 처음부터 그러한 의심과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어서 인간을 알고, 자연과 우주를 아는 일에, 궁극적으로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도움을 주는 학문이기 때문에 필요로 하는 것이다.

둘째, 인간이 존재하면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하는 방향제시 및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해 준다. 신학은 단순한 지적 축적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삶을 차원 높은 단계로 살아 가도록 하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인간보다 차원이 낮은 동물을 숭상하며 살아가는 토테미즘에 심취해 살아가는 인간과,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동시에, 인간 존재의 가장 숭고한 존엄성을 주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사는 인간을 비교해 보면, 신이 인간에게 어떤 존재로 타나나며 인간은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바르게 살아가는, 또는 어떤 방법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신(하나님)의 존재나 정체성을 인정하거나, 나아가 그 신이 제시하는 것에 동의하고 순응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당위성을 신뢰하게 하는 학문이 신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하나의 자연적 인간으로서 보다 거룩한 자와의 삶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 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셋째, 신학은 인간 존재의 인격형성이나 사회 삶의 질서를 향상시키는 학문적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가치가 있다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 때문에 불신자들도 겨우 도덕적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사회질서 형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미지(Image of God), 즉 하나님의 형상이 반듯이 인간 영혼 속에 내재해 있어야 한다. 인간행동의 결과는 영에서 시작하므로 영성개발 및 활동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이 영은 정신에게 지시하고, 정신은 육체에 행동을 명령하므로 비로서 인간활동이 시작하게 된다. 영이 건전하거나 온전치 못하거나, 아예 죽어 있으면 동물 감각적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회가 갈등, 분열, 투쟁이나 분쟁, 또는 전쟁같은 것이 다반사로 발생하는 것은 이러한 거룩한 영적 기능, 즉 성령의 활동을 모르거나 무시하기 때문이다. 신학은 이러한 과정과 연관된 내면의 실체를 알게 해 주는 학문이다.

넷째, 신학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자유한 존재임을 알게 해 주는 학문이다. 여기서 자유란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자유적 성품을 말한다. 구약, 출애굽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자 니라” 하고 있어 무한히 자유하신 하나님 임을 말하고 있는데, 인간은 그런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신학을 통해서 알수 있게 된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자유성을 오용, 남용, 무시하기 때문에 범죄적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또한 신학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다섯째, 신학은 교회와 목회를 성장시키는 근본 이론을 제시한다. 교회설립이나 목회는 신학을 토대로 하여 세워지고 목회가 이루어져야 한다. 개신교회가 목회적으로 몇몇 사회적 비난의 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신학적 기반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건강하게 왕성히 부흥하려면 튼튼한 신학적 토대를 이루어야 한다. 컴퓨터가 제 구실 하려면 소프트웨어가 양호해야 하는 바와 같다. 로마제국시대 교회가 유럽 곳곳에 굳건히 설립되게 되었던 것은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몇몇 신학의 가치나 필요성을 연구해 보았다. 결과, 이러한 신학의 가치나 효율성이 21세기 이성이나 과학주의에 의해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삶의 지렛대요, 나침반인 신학이 활성화 되지 못하니 인간정신이 혼미한 생태를 유지하여 사는 것이다.

더욱이, 신학을 일반 다른 학문과 동일시 취급하는 신학자들이 있다. 아니, 신학자임에도 오히려 철학이나 과학을 신학보다 우위에 두는 자들이 설치는 세태다. 신학의 보조 학문들을 주(Main) 학문으로 올려놓고 있으니 신학의 학문적 가치가 저하될 수밖에 없다. 신학자로서 스스로 정체성을 깍아 버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신학자인지, 과학자인지, 철학자인지 구분을 할 수 없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행태들이 오늘날의 기독교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있다. 이렇게 신학의 신성함을 무시하니 기독교 교회가 천박한 세속인들에 휘둘리킬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목회자들, 특히 신학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심각하게 자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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