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자이자 평론가인 브랜든 쇼월터 기자의 기고글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상처… 교회 내 상처가 기독교 이탈을 부추기는 이유’(When 'God' becomes the abuser: How Church wounds fuel Christianity's exodus)을 7월 1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수년 전, 필자가 2000년대 중반 잠시 출석했던 교회에서 알게 된 한 지인이 소셜미디어 게시물에 댓글을 남겼다. 꽤 직설적이고 신랄하게 의견을 밝힌 글이었다.
기억이 맞다면 민감한 생명윤리 문제에 관한 게시물이었다. 그녀는 혐오감을 조금도 감추지 않은 채, 필자를 얼마나 끔찍하고 역겨운 존재로 여기는지 노골적으로 쏟아냈다.
기분이 상했다기보다는 다소 놀라웠다. 필자가 그녀를 알게 된 이후로 가치관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낌새는 지난 몇 년 동안 느껴왔지만, 개인적으로 얼굴을 붉힐 만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필자에게 그렇게까지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를 비롯해 그 교회의 많은 청년과 가족들은 한 목회자로부터 끔찍한 학대와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 필자는 그 목회자를 짧은 기간 알고 지냈을 뿐이었고, 그를 싫어할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난 지 몇 년 뒤부터 그에 관한 불미스러운 이야기들이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저지른 일들은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것이었고, 수많은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녀가 소셜미디어에서 필자에게 분노를 쏟아낼 당시만 해도 필자는 이런 내막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필자는 자신의 글이 그렇게 불편하다면 팔로우를 끊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녀는 대략 이렇게 답했다.
“아뇨, 절대 끊지 않을 겁니다. 나는 ‘악의 진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위해 당신을 팔로우하는 거니까요.”
필자를 향한 그녀의 노골적인 경멸이 어딘지 모르게 흥미로웠다. 적어도 솔직하기는 했다. 필자는 대화를 이어가며, 자신의 견해가 단지 ‘정통 기독교인’들만 공유하는 생각이 아니라 이념적으로 매우 폭넓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관점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는 즉각 반박했다: “나는 그 다른 집단에도 동의하지 않고, 그 종교들도 싫어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정말 혐오해요.”
그녀의 마음속에서 필자는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 폭력적인 목회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필자와 그 목회자가 신학적 견해와 철학적 관점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었기에, 둘을 굳이 구별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목회자를 향한 끓어오르는 경멸을 필자에게 투사하며 두 사람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녀가 겪은 일의 복잡한 내막을 모두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을 향해서도 같은 투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그 잔인한 목회자는 곧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언어폭력을 일삼는 폭군, 그것도 전지전능한 폭군으로 전락했다. 어쩌면 여기서 ‘하나님’이라는 말에 따옴표를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혐오하는 대상은 하나님의 참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을 통해 형성한 왜곡된 하나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누가 신성하고 전능한 나르시시스트 학대자를 경외하고 섬기고 싶겠는가. 만약 하나님이 학대자라면, 그 하나님에게 맞서고 그분이 지지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겠는가.
그녀는 자신과 많은 또래에게 상처를 남긴 그 끔찍한 남자와 신앙 공동체로부터 예수님을 분리해내지 못했다.
정확한 수치로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수년간 기독교 언론계에 몸담아 온 필자는 이런 일이 지금 일종의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고 믿게 됐다. 과장이 아니다. 단순한 추세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양상은 제각기 다르지만, 이 현상은 교단과 교파를 넘어 다양한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타락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적 한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부 폭력적인 지도자들이 유독 더 큰 피해를 일으키는 이유는, 그들이 속한 기관 안에서 형성된 교리적 강조점과 태도, 사고방식이 파괴적인 행동을 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의를 담대하게 말했을 뿐인데도 모든 것을 쉽게 ‘폭력적’이라고 규정해버리는 젊은 세대의 자기중심성과 나르시시즘도 분명 존재한다. 그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그 문제가 아니다.
CP는 과거 교회 리더십 안에 퍼진 ‘나르시시즘의 대유행’을 보도한 바 있다. 또한 2019년 기획한 ‘기독교를 떠나다(Leaving Christianity)’ 시리즈에서도 그런 유형의 목회자와 지도자들을 다뤘다.
당시 복음주의 기독교 매체가 자신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냉철하고 정직하게 바라보고, 사역 현장의 도덕적 실패와 관계적 역기능, 구조적 문제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는 사실에 수많은 독자가 기뻐하면서도 놀라워했다. 그중에는 교회에서 심각한 상처를 입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리즈는 지금도 필자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평범한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넘치는 가족, 따뜻한 목회자, 건강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살아왔고 이런 어두운 현실에 노출된 적이 없다면, 이러한 문제는 애초에 인식의 범위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필자는 그런 사람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년 전 필자에게 분노를 쏟아냈던 그 여성과 오늘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필자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사랑하신다고 말해주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다.
그녀는 십중팔구 그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저 묵묵히 들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 놓인 깊고 깊은 간극 앞에서 말이다.
자유의 방파제가 무너질 때
미국 건국 250주년을 앞두고, 미국의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몇몇 발언과 함께 오래전 그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애덤스는 입헌공화국이 살아남는 데 필요한 미덕을 길러내고 진정한 자유를 보존하는 핵심 기관으로 학교와 교회의 강단을 꼽았다. 그는 이곳이 사람들에게 ‘자유의 정신’을 불어넣는다고 믿었다.
1798년 매사추세츠 민병대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 헌법은 오직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국민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 밖의 어떤 사람들에게도 전혀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교회의 강단과 ‘하나님’이 학대자로 인식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애덤스가 자유의 필수적인 방파제라고 믿었던 가치와 제도들이 수많은 사람에게 영적으로 부패하고 응어리진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어떻게 될까.
필자가 목격한 과정은 이렇다. 상처는 아물지 않고 감염되기 시작한다. 감염은 퍼져나가고, 마음은 어두워지고 굳어지며 반항하게 된다. 무너진 교회의 잔해 위에서 신을 부정하는 이데올로기들이 독버섯처럼 자라난다. 때로는 더 잔인한 주인이 그 공백을 차지하고, 쓰라린 복수를 약속한다.
그 과정에서 유대·기독교적 규범과 윤리에 뿌리를 둔 소중한 자유는 서서히 침식된다. 한번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는 일은 헤라클레스의 과업처럼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될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 그 상처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겨났든, 종교적 상처는 사람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든다. 학대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도용되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강단의 가치를 ‘자유의 정신’과 연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가치들을 자신이 겪은 학대와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지켜야 할 유산이 아니라 뿌리 뽑고 파괴해야 할 억압적 잔재로 변한다. 그리고 복수심이 거셀수록 더 정의롭다고 느끼게 된다.
누군가는 이처럼 깊은 상처를 짊어진 사람들을 품고 돌보아야 한다. 그 상처로 인해 하나님께 등을 돌린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우리의 치유자이신 여호와 라파, 주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상처받은 이들을 바라보고 계신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그리고 주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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