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는 말론 드 블라시오 작가의 기고글인 ‘하나님은 왜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까?’(Why doesn’t God answer all of our prayers?)를 7월 1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블라시오 작가는 문화 옹호자, 기독교 작가, 그리고 '문화를 분별하다'(Discerning Culture)의 저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기독교인들은 어떤 문제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권면을 자주 받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입해 주시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관심하시기 때문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시편 기자는 확신에 차 이렇게 고백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편 55:17)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 그렇기에 기도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이해 역시 새롭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도는 신자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기도를 단지 물질적 유익을 얻기 위한 영적 훈련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히브리서 4:16)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기도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주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지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태복음 6:10-13)
근본적으로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지혜를 구해야 한다. 야고보도 이렇게 강조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야고보서 1:5)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디모데전서 6:12)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끊임없는 영적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 속에서도 기독교인답게 살아갈 담대함을 구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가장 어두운 순간에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라고 기도하셨던 그 발자취를 기꺼이 따를 수 있는 지혜도 구해야 한다.
필자의 아내가 루게릭병으로 투병할 때, 필자는 병원에서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느 여름날 오후, 병원 뜰로 나가 벤치에 앉았다. 우리 가족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필자는 그곳에서 우리가 직면한 가혹한 시련을 깊이 묵상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것은 뼈를 깎는 듯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가족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내면의 힘과 평안, 지혜, 그리고 깊은 정서적 위로를 부어주셨다.
아내는 놀라울 정도로 담대하게 병마와 싸웠다. 아내의 태도와 평온한 모습에는 분명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전문의와 간호사, 간병인, 의료기기 기술자들마저 종종 그녀의 모습에 감탄했다. 우리는 바울이 기록한 말씀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고린도후서 1:3-4)
물론 회의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왜 인류에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지에 대한 더 본질적인 질문을 필자가 놓치고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주 간과하는 사실도 있다. 이 세상에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녕과 축복도 넘쳐나지만, 하나님은 그에 대한 감사를 거의 받지 못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풍성한 일반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미래를 계획하는 지혜, 수고의 열매를 누리는 성취감이 그 예다. 또한 사회생활의 즐거움과 만찬과 축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미각, 취미와 스포츠, 다양한 오락도 허락하셨다.
이 모든 것을 단지 엄격한 자연법칙의 결과로만 돌리는 것은 지적인 불의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맹목적인 운이나 우연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재앙이 닥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다며 그분을 비난한다. 우리는 인간의 삶이 행복과 고통을 모두 경험하는 여정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삶의 우여곡절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최후의 현실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확실한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 필요한 은혜를 계속 구해야 하며, 물질적 축복을 구하는 것 역시 잘못이 아니다. 다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까지 저버려서는 안 된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앞서 하신 또 다른 말씀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나타나는 화평과 온유, 마음의 청결을 지켜낼 힘을 구해야 한다. 이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11)
우리가 올바른 관점과 우선순위를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것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실 때에도 자신을 탓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분께서 이미 베풀어 주신 일반은총에 감사해야 한다. 또한 이 타락한 세상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 기쁨과 평안에 언제든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감사해야 한다.
필자는 하나님께서 왜 어떤 기도에는 응답하시고, 어떤 기도에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두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께 모든 이유를 따져 물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기독교인의 진정한 관심은 오직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에 있어야 한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 부서진 세상에서 많은 사람을 구속하고, 그분의 지속적인 힘과 지혜가 우리의 삶에 임하는 것이다.
어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받고, 어떤 기도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항상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을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3:5)고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가장 앞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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