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예수 죽음의 독특성: 음부(陰府)와 대결하심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예수의 죽음은 “악법도 법이다”라고 체제에 순응하면서 독배를 마시고 조용히 죽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지 아니했다. 예수는 구약성경의 족장들(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등)처럼 천수(天壽)를 다하고 평온히 죽지 아니하였고, 하나의 노예 내지 흉악범 같이 십자가 위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실상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치욕스럽고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 주셨다. 예수는 그처럼 신뢰했던 아버지에 의하여 버림을 당하는 데 대한 절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 운명하셨다. 소크라데스의 죽음은 평온했고, 죽은 뒤에는 그것으로 끝났고 아무 것도 없이 그의 삶은 종결되었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대통령의 자살의 경우 그를 순식간에 미화하여 전 국민의 영웅으로 만드는 이상한 국민감정이 일어났다. 심지어 기독교 진보주의 목회자들은 그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과 같이 다루면서 많은 신앙적 혼선을 가져왔다. 실상, 노무현의 죽음은 안타깝게도 전직 지도자의 절망적인 현실도피요 자살이지 우리 사회의 정의와 민주발전을 위해 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모방 자살을 부추긴 것이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전직 지도자가 자살하는 불안정한 국가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2009년 6월18일 개신교 진보주의 목사 1,024인 시국선언에는 "부엉이 바위에 묻어 있는 핏자국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의 죽음을 봅니다" 에 대해 전 숭실대 대학원장이요 한국교회법연구원장인 김영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며, 부엉이 바위에 묻어 있는 핏자국은 자살의 흔적이다’고 양자를 구분하였다. 투신자살한 자의 신분은 전직 대통령이나 형사법적인 입장에서 볼 때 형사 피의자의 신분이었는데 기소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당사자가 자살한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 1,024인 시국선언은 취소되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원로 장로인 김영훈은 "만약 비성경적 내용의 시국선언을 끝까지 고수하시려면 목사직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두렵습니다"고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골고다의 언덕의 피와 부엉이 바위의 피는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하나님 아들이 흘린 인류대속을 위한 희생의 피나, 후자는 일개인이 자처한 연루된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보호를 위한 피다. 전자는 인류의 대속을 가져 왔으나 후자는 기소중지를 통하여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안전만을 가져왔을 뿐이다.

예수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가져왔다. 예수는 음부(Gehenna, hell), 죽음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셨다. 어느 인간도 실제로 하지 못한 일을 하신 것이다. 예수는 음부의 세계에서 죽음과 대결했다. 그런데 죽음의 권세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음부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음부는 그것이 더 이상 자기 권세 아래 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토해낸 것이다. 아들은 그 본성에 있어서 불가사적(不可死的)인 하나님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는 죽음을 죽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죽음에 관하여 다음 같이 담대하게 말하고 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6. 속죄제물이자 대속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예수는 제자들에게 종교를 남겨두지 아니했다. 그가 제자와 추종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의 승천 후 보내신 성령의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다시 사셨고, 그는 세상의 구주이시다!)을 전파하였다. 예수의 추종자들 사이에 그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공동체로 나타났다. 이것이 기독교다. 기독교는 예수의 피를 믿고 속죄함을 입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종교이다.

이미 중동 아시아와 고대 사회의 여러 종교에서 짐승의 피를 바치므로 제사자의 죄가 속죄를 받는 의식이 있어왔다. 이스라엘 종교에서는 구약의 어린 양이나 염소의 속죄는 앞으로 올 메시아의 속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예수의 속죄는 역사적으로 일회적이며 유일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들이 인간이 되시고 유일회적으로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 아들로서 우리 인간의 유일한 속죄자가 되셨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적을 상징하는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면서 다가오는 메시아의 구속을 예언하고 있다(사 63:4-5). 아무도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셔서 스스로 구원자가 되신 것이다.

아직도 다른 종교에서는 짐승제물이 되풀이 된다. 그 이유는 다른 종교들은 모두 인간들로부터 나온 종교들이기 때문에 그 제물이 흠이 있어 온전하지 못하며, 제사드리는 자들도 허물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증언한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히 10:11). 이 구약의 제사는 다가오는 실재의 예표이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 10:1).

기독교에서 하나님 아들의 제물은 더 이상 되풀이 되지 않는 단 한번만에 결정적인(once for all) 제물이 되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예수는 희생되시기 때문에 승리자시다(Victor, quia victima).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말씀이실뿐 아니라 스스로 유일한 속죄자요 구속자이신 것이다.

속죄의 신비는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써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논리다. 속죄의 신비는 하나님이 인간의 눈 높이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죄인인 인간을 대신하여 속죄제물이 되는 십자가의 신비로 수행되었다.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써는 결코 밝혀 낼 수 없는 신비다. 속죄의 신비는 섬김의 종으로 오신 예수의 속죄행위로서만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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