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플 때의 관심은 넉넉한 식생활을, 그리고 몸이 아플 때는 건강을 도모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런 문제들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어느 정도 해결되자 이때부터 인간은 공동체적 책임에 태만하게 된 것이다. 그럴 경우, 자신의 대사회적 기능이나 역할, 공공인으로서의 의무를 상실하게 되기 쉽다. 자신의 평안함이나 안전성을 추구하여 안락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실생활에서 우선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반대급부적으로 자신의 정체성, 직업의식, 사회도덕적 책임과 그 기능의 상실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은 세계적 현상과 함께, 한국기독교의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인식도 지금 큰 변화를 겪고 있음을 보게 된다. 양심과 도덕질서보다는 자신의 신분과시에 여념이 없는 현실이다. 이는 자신이 목회자라는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를 말씀하신 일이 있다. 험한 산지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음직전 상황까지 이르렀던 사람을 종교의식을 담당하던 제사장도, 레위인도 본체만체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미워하고 차별하던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해 주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누가 참된 이웃이냐’를 말하는 것으로 설교하지만, 어찌 성경을 그 논조 하나 만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종교지도자들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마음 아픈 사실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비추어, 오늘날 교회 사역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비평적으로 돌아보게 된다. 첫째, 위에 제시한 비유를 예로 들어 말한다면 종교지도자의 사명은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해야 하며, 권리를 세워주어야 하는 일이다. 곧 의를 실천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현장을 회피하므로 비난받을 일을 한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종교적 업무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도 인간의 생명을 돌보는 일이나 인격이나 존엄성을 존중하는데, 종교지도자들이 그냥 나 몰라라 지나쳤던 것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종교인으로서의 신분과 의무를 망각하고 상실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을 믿게 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해야 할 하늘로부터 받은 신성한 의무를 지닌 영적 지도자들이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나 인간사랑의 실현을 주저하거나 외면 혹은 무관심한 것은 큰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런 불의는 한국의 모 교단신학교와 그 교단 총회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최근, 한국의 모 교단 신학대학교 모 교수가 진화론에 바탕을 둔 유신진화론을 주장하였다. 그 교단은 소위 복음주의 신학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신학대학교로서 모 교수는 창조론을 부정하는 유신진화론에 근거한 강의를 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아무리 학문의 자유가 있다 해도 교단신학교는 해당 교단의 신학 입장과 학교의 건학이념 또는 교육목표를 근간으로 하여 설립된 것이므로 이를 무시하여 그 근간을 뛰어넘는 이념이나 학설을 가르치거나 교육하는 일은 바른 일(The right thing)이라 할 수 없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가 해당 교단의 이단대책위원회에서 “유신진화론은 신학적으로 교단의 정책이나 정체성에 위배되는 잘못”이라는 것으로 파직·출교 판정을 받았음에도 교단 총회에서는 “문제 없다”로 결의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신앙과 신학적 기반으로 삼아 설립된 교단신학교가 창조론을 부정하고 진화가 하나님의 창조라는 유신진화론을 강의하였음에도 “문제 없다”고 판단한 것은 신앙의 표준은 물론 교단 헌법이나 복음주의 신학적 논리로서도 굉장히 모순된 일을 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 교수가 아직도 교육현장에서 강의하고 있어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교단과 학교입장이 매우 안타깝다. 그리고 교단정책이나 이념에 위배되는 학설에 대해서도 “그게 무슨 문제냐”로 결정한 총회의 결의는 결과적으로 비겁하고 비신앙적인 일들을 한 결과를 낳았다. 만약 총회에서 창조론을 부정하고 유신진화론이 옳다고 인정한다면, 즉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원숭이를 근본으로 하여 진화된 존재라고 교단의 교육정강정책을 총회에서 바꾸어야 합리적이고 타당한 일이라 생각된다. 해당 교단은 성경의 창조론 아니면 진화적 창조론 중 하나를 속히 선택해야 마땅할 것이다.
또한 이와 관련한 해당 교단 목회자들의 도덕적 자세나 리더십도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이단대책위원회에서 파직·출교를 최종판결 했음에도 피해를 입을까봐 겁을 먹고 정치적으로 묵인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명백한 잘못을 의도적으로 모른척하고 지나쳐 가는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것이다.
어떤 목사는 유신진화론을 주장하고 옹호하며 총회석상에서 교단 신학대학교 총장을 대놓고 모욕하고 다른 선배 목사를 호명하며 면박을 주었다. 또 다른 목사는 이대위원들이 6개월 가까이 법적 절차를 지키며 15회나 재판을 진행 하였음에도 그들에게 “재판은 하지 않고 정치만 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이대위를 크게 모욕하였다. 이들은 모두 교단의 명성과 총회의 위상을 크게 추락시킨 장본인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옳고 그름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판단하는 목회자들, 그들의 만용을 지켜보기만 하는 이들을 목격하며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현장이었다. 목회자들의 인격, 신앙, 신학이 무너지고 선배들이 그토록 헌신해 왔던 교단의 질서까지 무너진 “호랑이 없는 곳에서 토끼가 왕노릇한다”는 모습을 보면서 서글프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양새를 본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방원의 ‘하여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트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누가 뭐라해도 나만 편안하면 되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목회자의 양심이 잠자고 있는 듯 싶다. 모든 것이 다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과 오만이 우리 안에 있지는 않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겉으로는 박식해 보이고 화려해 보여도 영적, 인격적, 신앙적 인간성의 빈곤함을 그대로 드러낸 삐뚤어진 목사들의 모습에 허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강도 만난 중환자(교단과 신학교)를 목숨걸고 치료해 준 유대인에게 멸시받던 사마리아사람, 그리고 모른척 하고 지나쳐 가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정치적인 지도자들) 세 사람 중에서 “네가 생각하기에는 진정한 네 이웃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물으신다면 오늘날 목사들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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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