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12조2000억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을 확정했으나, 내수 부진과 통상 리스크라는 복합적인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경제성장률이 0%대까지 하락할 수 있다는 전망 속에서, 이번 추경이 단기 대응에 머물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정부는 이번 추경을 '필수추경'으로 규정하고 재난 대응과 산업 보호, 민생 안정에 초점을 맞췄다. 예산 배분은 산불 피해 복구에 3조2000억 원, 통상 리스크와 인공지능(AI) 산업 지원에 4조4000억 원, 민생 안정에 4조3000억 원이 각각 책정됐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기여도는 0.1%포인트에 그칠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2019년 이전의 추경 대비 가장 낮은 수치라는 평가다.
김윤상 기획재정부 2차관은 추경 브리핑에서 "이번 추경은 경기 대응 목적보다는 재난 및 산업안보 위기 대응에 방점이 있다"며, 정부가 향후 국회에서 증액 논의가 있을 경우 이를 수용할 여지가 있음을 시사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추경이 시기적으로 늦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명지대학교 우석진 경제학과 교수는 1월부터 신속한 대응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경제 상황을 과소평가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실제 집행 시기가 5월 말 또는 6월 중순 이후로 예상되며, 이미 1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백철우 덕성여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도 지난해 여야 대립과 탄핵 정국으로 인해 예산 논의가 지연됐으며, 시급했던 추경 편성이 늦어진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그는 하반기 추가 추경에 대비해 보다 구체적인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추경의 구체적 항목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됐다. 우 교수는 소상공인 대상의 소액 지원 정책은 실질적 매출 회복에 미치지 못하며,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또한 AI 산업 지원과 같은 중장기 과제를 급히 추경으로 편성한 점도 부적절하다는 견해를 내놨다.
정치적 판단이 앞섰다는 지적도 나왔다. 야당이 주장하는 민생회복 지원금은 배제하면서 온누리상품권 확대 등 특정 정책만 추진하는 모습은 정부의 접근이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백 교수는 2조1000억 원 규모의 통상 리스크 대응 예산으로 단기 대응은 가능하겠지만, 7월부터 본격 발효될 미국의 상호관세에 대비한 종합적 전략 마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특히 수출 감소에 따른 기업 자금난이 본격화할 수 있어 대출 지원 확대 등의 실효적 대책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이번 추경에는 수출기업을 위한 25조 원 규모의 특별자금과 15조 원의 저리 대출 공급이 포함됐지만, 수출 관세 대응 바우처는 기업 수요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기존 서비스를 단순히 묶은 수준에 그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핵심 품목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비축 확대 방안도 공급망 다변화 전략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특히 중국산 수입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베트남 등 다른 국가로 전환할 경우 가격 경쟁력 저하와 관세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또한 중소기업뿐 아니라 중견·대기업에 대한 지원 방안이 포함되지 않은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대기업도 관세 충격과 공급망 문제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추경안에 명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 조치로 인한 수출 둔화가 현실화되면, 한국 경제성장률이 0%대로 추락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국회에서 미국발 관세 충격으로 소비와 기업 심리가 위축되고 있다며 하방 리스크가 커졌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캐피털이코노믹스는 한국의 성장률을 0.9%로 하향 조정했으며, S&P는 기존 2.0%에서 1.2%로 낮췄다. 한국은행은 1분기 성장률이 0.2%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며 역성장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우 교수는 현재 정부의 정책 기조로는 1.5% 성장률 달성도 어려울 것이라며, 새 정부가 어떤 정책을 펼치느냐가 향후 성장세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도 1분기 역성장 가능성을 언급하며, 새 정부에서 강력한 경기부양책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추가 재정 지출에 대한 우려도 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8조 원 규모의 적자국채 발행이 시장 금리를 자극해 가계와 기업의 금융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지적하며, 선제적인 금리 인하 같은 통화정책이 더 적절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번 추경 외에도 본예산, 기금, 공공기관 투자를 신속히 집행해 경기 회복의 모멘텀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구조적인 경기 부양책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경제 체력 회복은 더욱 지연될 수 있다는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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