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락 목사
배경락 목사 ©기독일보DB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을 살펴보니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전 아이들이 자랄 때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먼 훗날 아빠를 기억할 때,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는 것이 삶의 자양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광화문 교보에 가서 책을 구경하고 피맛골 먹자골목에서 삼치를 먹었습니다. 한달에 한 번은 여행을 떠나 추억을 쌓았습니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나니까 여행 갔던 것보다 정기적으로 들리던 서점과 삼치를 더 기억하더군요. 저는 아이들을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낌없이 다 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사랑을 정의할 때 제일 먼저 ‘오래 참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과 오래 참음이 연결되나요? 오래 참는다는 말은 상대방이 부족하고 불완전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모든 연약함을 품어 안는다는 뜻이지요. 솔직히 전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나는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는데 상대방은 자꾸만 잘못을 저지릅니다. 나는 상대방에게 사랑을 퍼붓는데 상대방은 나를 공격합니다. 나는 상대방에게 친절을 베푸는데 상대방은 나를 외면합니다. 나는 상대방에게 오래 참는데 상대방은 걸핏하면 화를 냅니다. 나는 상대방에게 은혜를 베푸는데 상대방은 너무나 냉정하게 계산적으로 대합니다. 이런 일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일입니다.

이럴 때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실 전 이런 사랑을 하는 데 별로 익숙하지 않습니다. 베풀면 받고 싶은 것이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그래도 억지로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도 오래 참고 인내하는 모습은 정말 숭고한 사랑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아버지는 엄청난 부자인데 해외 유학간 자녀가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하면서 궁색하게 삽니다. 자녀에게 돈을 주어야 하는데 참는 부모는 정말 대단한 부모입니다. 쉽게 얻은 돈은 인생의 교훈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자녀가 큰 병으로 고통을 받는데, 부모가 그걸 보고만 있는 거에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병원에 데려갈 능력은 충분합니다. 당장이라도 고쳐줄 수 있는데 안 데려가는 거에요. 이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누구도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상황에도 참는 것을 봅니다.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호소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꾹 참고 외면하셨습니다. 이게 사랑입니까?

저는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오래 참음이 매우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감히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넓고 크고 높고 깊습니다. 하나님이 정의하시는 사랑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통증을 느끼는 감각기관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당하는 아픔과 고통과 설움과 눈물과 억울함을 느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인간들아 행복하여라”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로만 우리를 사랑한다 하지 않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사셨습니다. 수치, 모욕, 침묵, 외면, 버림받음, 약함 등 모든 안 좋은 것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디셨습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받는 모든 고통을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다 보고 계셨지만, 끝내 참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모든 참음은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낌없이 전부 다 주셨는데, 물과 피와 고통과 눈물을 다 쏟으셨는데 인간은 극악무도하여 주님께 정말 못할 짓을 했습니다. 죄의 권세 아래 있던 인간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짓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영이나 되는 천사를 불러 처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를 그냥 허용하셨습니다. 온 몸으로 인간이 던지는 모든 악함과 더러움과 치사함과 배신과 모욕과 험담과 욕설과 찌름과 상처와 고통을 온 몸으로 받으셨습니다.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최악을 최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저주를 은혜로 바꾸셨습니다.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셨습니다. 못을 박고 창으로 찌르고 협박하고 공포를 조성해도 주님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상의 주님 모습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부활 후에도 주님은 온몸의 상처난 흔적을 하나도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허리에 창 자국, 손에 난 못 자국 그대로 가지고 부활하셨습니다. 마음만 먹으셨다면 완벽하고 깨끗하고 온전한 육체로 부활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상처를 간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도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했던 고통을 기억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설움을 기억하겠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좋을 때만 함께하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울 때 힘들 때 아플 때, 눈물 날 때 함께 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환란에 동참”하였다.(사63:9)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도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고통이 좋아서 참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자들에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우리에게 각자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마시던 잔을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노라 고백하였습니다(골1:24). 초대교회의 가장 큰 힘은 타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끝까지 참고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며 생명까지 주면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참음의 사랑을 보여주므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힘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초대교회가 가졌던 이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 배경락 목사는 기독교 인문학 연구소 강연자로, '곧게 난 길은 하나도 없더라' '성경 속 왕조실록' 등의 저자이다. 그는 일상의 여백 속에 담아내는 묵상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인문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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