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곽건용 목사 페이스북

나는 신학도의 여정을 걸어오면서 두 번의 '이사'를 단행했다. 첫 번째 이사는 내가 대학생 때까지 속해 있던 교단의 신학교를 떠나 다른 신학교로 이사한 거고, 두 번째는 내가 태어나 삼십 여 년을 살아온 고국을 떠나 이곳 미국으로 이사한 것이다. 두 번째 이사는 그저'유학' 또는 '이민'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에 따라 내 신학적인 입장과 견해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니 이 또한 신학도로서 이사한 거라고 부를만 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승려였다가 목사가 된 부흥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전봇대에는그런 부흥사가 인도하는 부흥회 포스터가 드물지 않게 붙어 있었다. 난 고등학생 시절에 동네 한 교회에서 그런 부흥회를 한다고 해서 가본 적이 있는데 차마 끝까지 못 듣고 중간에 나왔었다. 그 부흥사가 자기가 수십 년 믿어온 불교를 얼마나 무식하게 까대든지 당시 보수교회의 열혈 기독학생이었던 나조차 끝까지 듣지 못하고 뛰쳐나왔던 거다.

나는 그 부흥사처럼 내가 떠난 동네를 욕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첫째는 매우 '이기적'인 동기에서다. 결국 내가 싫어서 떠났지만 그 전에 내가 선택한 동네인데 그걸 욕하는 건 누워서 침뱉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떠난 동네를 '디스'하는 건 결국 내 선택을 '디스'하는 것이니 말이다. 둘째는 그 동네에 계신 분들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나랑 생각은 다르지만 그분들은 거기가 좋고 또 보람도 있고 할 일도 있기에 거기서 열심히 일하실 텐데 내가 떠났다고 좋지 않게 얘기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옛동네에 있을 땐 그 동네 신학교 교수들은 대부분 신학적으로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들이 공부한 학교들(대부분 미국 어딘가에 있는 학교들이었고 아주 일부는 유럽의 학교였다고 기억하는데)도 대개 그랬다. 그러니까 그들이 공부한 내용과 믿고 삶으로 살아내는 신앙 사이에 괴리가 없거나 적었던 거다. 학문과 삶이 대체로 일치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요즘 옛동네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분들 중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중도적이거나 약간은 자유주의적인 학교에서 공부한 분들이 적지 않은 거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의 경우에는 보수적인 신학교들이 예전보다는 더 자유로워졌다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학교들을 다니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미국의 경우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들 중에 중도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경향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에서 출판된 경우들이 있다는 사실은 안다. 그리고 미국의 보수적인 출판사들이 과거에는 절대 출판하지 않았을 책들을 '과감하게' 출판하는 경우는 하도 흔해서 이젠 얘깃거리도 안된다.

미국의 경우엔 성서학 분야의 박사논문이 SBL(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의 Dissertation Series에서 출판되면 매우 성공한 경우로 친다. 이밖에 논문 양식을 조금만 읽기 쉽게 바꿔서 일반적인 기독교 학술서를 내는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도 성공이다. 유수의 대학출판부에서 출판된 경우도 대박 성공으로 친다. 유럽의 경우엔 독일의 Walter de Gruyter나 Mohr Siebeck, 그리고 화란의 E. J. Brill 같은 데서 논문이 출판되면 대단한 성공으로 치부하고 교수로 취직하는 데도 큰 가산점이 된다. 그런데 이런 출판사에서 빠꾸맞으면 돈 받고 논문 출판해주는 출판사에서 득달같이 연락이 온다.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들이 논문 출판해줄 테니 얼마의 돈을 내라고 말이다. 취직하는 게 급하니 개중엔 이런 출판사에서 논문을 출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미 학계엔 그런 출판사의 평판이 알려져 있으므로 득이 되긴커녕 해가 된다는 얘길 들었다.

유명하고 권위 있는 출판사에서 출판된 한국학자들의 책을 보면 엄청 반갑다. 괜히 내가 다 뿌듯해진다. 코스웍 할 때 소선지서 중 한 책을 갖고 하는 세미나에서 교수가 한국학자가 쓴 책을 필독서로 정해주면서 그걸 꼭 읽고 토론하자고 해서 기쁜 맘으로 읽은 적이 있다. 그 교수는 저명한 학술지에 그 책의 서평을 쓰기도 했다. 나는 그 책이 꼭 갖고 싶었지만 엄청나게 비싸서 불법인지 알지만 그걸 복사해서 지금도 갖고 있다. 누가 쓴 무슨 책인지 밝히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그런데 이번에 문창극 씨를 옹호하는 목회자, 신학자들의 성명에 그 책의 저자 이름이 들어있어서 놀랐다. 나는 그분을 직접 알지는 못한다. 말 한 마디 나눠본 적도 없고 그저 책을 읽었을 뿐이다. 그 분은 소예언서들 중에도 아모스나 호세아, 미가 같은 책들보다는 덜 다뤄지는 책을 갖고 학위논문을 썼다. 사회정의 같은 주제가 드러나는 책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논문이 채택한 방법론과 주석의 내용이 문 씨를 옹호하는 성명서에 이름 올리는 일과 어떻게 양립하는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하긴 한국에서 교수가 자기가 아는 것, 믿는 것을 전부 다 학생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내가 나온 자유로운 분위기의 신학교라고 해도 그럴 거다.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학교마다 학풍과 분위기란 게 있고 또 특정 교단에 속한 신학교라면 교단의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의 문제가 아닐까? 학문적 입장과 신앙의 입장이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말이다.

나는 교인들과 성경공부 할 때나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세상에 목사는 알아도 괜찮지만 일반 신자는 몰라도(혹은 몰라야) 되는 신앙 진리란 것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나말고 누가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건 책에서 배운 건 아니고 내가 만들어낸 말이다. 듣는 사람들 입장을 고려한답시고 여기서 한 말과 저기서 한 말이 다르면 언젠가는 문제가 터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게 습관이 돼서 이유 없이 입장 바꾸는 걸 스스로에게 정당화할 위험도 있다.

청중이 누구냐를 고려하지 않고 똑같이 말할 수는 없다. 준비된 청중에게 하는 말과 준비되지 않은 청중에게 하는 말이 같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건 말을 풀어가는 방법이나 레토릭에 관한 얘기지, '내용'(substance)에 관한 얘기여서는 안 되는 거 아닐까? 결국 어딜 가든, 누구에게 말하든 내가 옳다고 믿는 얘길 하는 게 맞는 거 아니겠는가 말이다.

문 씨는 이미 갔지만 그를 옹호하는 '성경적 민족주의' 운운 성명서에 이름 올린 분들이 얼마나 민망할지를 생각해보면 문 씨가 더욱 더 원망스럽다. 혹시 이 글이 가뜩이나 민망한 분을 더욱 더 민망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해서 쓰길 망설였지만 오랫동안 생각해온 문제였기에 결례를 무릅쓰고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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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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