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케네스 로열 박사의 기고글인 '예수님과 죄 없는 삶: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일'(Jesus and a sinless life: A statistical impossibility)을 7월 2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케네스 로열 박사는 심리측정학과 의학교육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연구자로, 과학적 증거와 기독교 신앙의 관계를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기독교 신앙은 세 가지 핵심 진리 위에 세워져 있다. 예수께서 죄 없는 삶을 사셨다는 것,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예수님의 ‘죄 없으심’은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진리다. 아마도 십자가와 부활만큼 그 중요성이 즉각적으로 와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죄 없는 삶은 우리에게 너무나 낯선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며, 누군가 죽음에서 돌아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생각과 말, 행동으로 실패하기 때문에 죄가 전혀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는 좀처럼 그려내지 못한다.
예수님의 무죄함은 기꺼이 인정하면서도, 그 의미를 마땅한 진지함을 가지고 면밀히 살펴보는 경우는 드물다.
심리측정학을 연구하는 필자는 사회과학과 행동과학에서 인간 행동을 분석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통해 ‘죄 없는 삶’을 바라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종종 생각해본다. 무죄함을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다른 인간 행동과 마찬가지로 엄밀히 분석할 수 있는 삶의 한 특성으로 다뤄보는 것이다.
현대 연구는 사람이 매일 내리는 선택의 방대한 규모를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는 죄 없는 삶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완전성을 요구하는지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행동과학자들은 인간이 하루에도 수만 가지의 결정을 내린다고 추정한다. 도덕심리학자들은 그중 수백 가지가 도덕적이거나 친사회적인 판단을 포함한다고 본다. 이러한 추정치는 인류학과 사회과학 전반에서 축적된 연구 결과를 반영한다.
가장 보수적으로 계산하더라도, 평범한 사람은 하루에 적어도 100번 이상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선택의 순간을 마주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수치가 중요한 이유는 모든 선택이 도덕적 가능성과 결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선택 대부분은 아주 사소하고 순식간에 일어나며,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거나 숙고하기도 전에 지나간다.
죄 없는 삶이 요구하는 완전성의 규모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일상의 미세한 순간들이 평생에 걸쳐 어떻게 축적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비교를 위해 33년이라는 기간을 설정해보자. 전통적으로 알려진 예수님의 지상 생애와 비슷한 길이다. 이 기간 동안 한 사람은 100만 번이 넘는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선택을 내리게 된다.
예수님의 죄 없는 삶에 대한 주장은 바로 이러한 배경 위에서 이해돼야 한다. 그것은 몇 차례의 거대한 유혹을 피했다는 정도의 주장이 아니다. 평범한 인간이 일상적으로 실패하는 100만 번 이상의 순간을 단 한 번의 도덕적 실패도 없이 통과했다는 주장이다.
각각의 도덕적 선택을 하나의 ‘시행’으로 본다면, 기초 확률론을 통해 죄 없는 삶의 가능성을 단순하게 모델링할 수 있다.
일생 동안 마주하는 도덕적 선택의 총횟수를 (N), 한 번의 선택에서 죄를 지을 확률을 (p)라고 하자. 그렇다면 모든 선택에서 죄를 짓지 않을 확률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1-p)^N]
이 모델에서 죄는 고의적인 잘못뿐 아니라 충동과 태만, 이기적인 태도, 판단의 실패 등 완전한 의에 어긋나는 모든 도덕적 선택을 포함한다.
이 결론에 필요한 가정은 특정한 도덕적 순간에 죄를 지을 가능성이 0보다 크다는 것뿐이다. 이 수학적 모델 자체에는 신적인 개입이나 초자연적인 능력을 전제하는 요소가 없다.
(p)의 값을 달리하거나 선택들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고 가정해도 곡선의 세부적인 모양은 달라질 수 있지만, 핵심적인 결과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실패할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 기회가 무수히 많다면, 적어도 한 번 실패할 확률은 사실상 확실성에 가까워진다.
예를 들어 한 번의 도덕적 선택에서 죄를 지을 확률이 불과 1만 분의 1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100만 번의 선택을 모두 죄 없이 통과할 확률은 다음과 같다: [0.9999^{1,000,000}] 그 값은 약 (3.7 \times 10^{-44})다. 소수점 아래에 0이 43개 이어진 뒤에야 유의미한 숫자가 나타나는 극도로 작은 확률이다. 일반적인 인간의 조건 아래에서는 사실상 일어날 수 없는 일에 가깝다.
이 모델의 규모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례와 비교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일상에는 주의력과 판단력, 인내와 자제력을 요구하는 수많은 순간이 있다. 대부분은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빠르게 지나가지만, 각각의 순간은 실수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 방대한 숫자를 추상적으로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인간의 주의력과 판단력이 지닌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친숙한 사례를 떠올려보는 것이 유익하다.
33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운전한다고 상상해보라. 속도를 잘못 판단하거나, 방향지시등을 늦게 켜거나, 중앙선을 넘거나, 차선을 너무 일찍 변경하는 등의 실수가 단 한 번도 없어야 한다. 오직 자신의 통제 아래 있는 행동에서만 완벽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갑자기 끼어드는 차량과 꼬리물기, 예고 없는 급제동 등 다른 운전자들의 모든 행동에도 완벽하게 대응해야 한다. 폭우와 빙판길, 짙은 안개와 눈부신 햇빛, 미처 발견하지 못한 포트홀과 같은 모든 환경적 조건에서도 한 번의 판단 착오도 없어야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운전했는지, 전날 밤 얼마나 잤는지, 마지막으로 식사한 지 얼마나 지났는지, 전화나 문자로 얼마나 주의가 분산됐는지와 상관없이 언제나 완벽한 집중력을 유지해야 한다.
사람은 단 한 시간조차 아무런 실수 없이 완벽하게 운전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은 19만 시간이 넘는 깨어 있는 시간 동안 도덕적으로 한 치의 흠도 없이 사셨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 규모를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보수적인 가정을 세워보자.
먼저 예수님께서 정확히 33년을 사셨다고 가정한다. 하루 평균 16시간 동안 깨어 있으셨다고 가정한다. 또 실제로는 한 시간에도 여러 차례의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판단이 일어나지만, 깨어 있는 한 시간을 단 한 번의 도덕적 선택 기회로만 계산한다.
이는 실제 선택의 수를 극단적으로 축소한 계산이다. 이러한 가정에 따르면 예수님은 약 12,045일을 사셨으며, 깨어 있는 시간은 약 192,720시간에 이른다. 시간마다 단 한 번의 도덕적 선택만 있었다고 보더라도, 거의 20만 번에 이르는 선택을 단 한 차례의 실패도 없이 통과해야 한다.
누군가 매우 안정적이고 외부 자극이 차단된 환경에서 살았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보수적인 계산은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실제 순간들의 수를 크게 과소평가한다.
수명을 줄여 계산하더라도 핵심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는 그 누구도 흠 없이 통과하기 어려울 만큼 방대한 도덕적 순간들이 포함돼 있다.
더욱이 이러한 추정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직면하셨던 특별한 도덕적 압박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
그분은 가장 연약하고 굶주린 상태에서 광야의 유혹을 견디셨다. 종교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감시와 부당한 고발을 받으셨으며, 피로와 스트레스와 압박 속에서도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셨다.
수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과 행동을 면밀히 지켜봤지만, 그분의 삶에서 죄를 입증할 만한 단 한 번의 도덕적 실패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러한 압박은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순간의 횟수뿐 아니라 그 강도까지 높인다. 따라서 이 단순한 수학적 모델은 일반적인 인간의 조건 아래에서 죄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심각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
과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것을 완전히 ‘증명’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신 증거를 축적하고, 나타나는 패턴을 분석하며, 여러 경쟁적인 설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타당한지를 판단한다.
인류학이나 행동과학이 예수님의 신성을 직접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삶이 평범한 인간의 삶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인간 행동의 일반적인 범위를 얼마나 뛰어넘는지는 보여줄 수 있다.
어떤 삶이 인간 행동의 통계적 한계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본성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인다면 과학은 적어도 그 비범함을 가리킬 수 있다.
필자는 수학이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엄격하고 보수적인 가정 아래에서도 죄 없는 인간의 삶이 통계적으로 극도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신적인 본성을 지니셨다는 설명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신자든 회의론자든 지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라면 외면하지 말고 검토해야 할 종류의 증거다.
인간은 평생 방대한 수의 도덕적 선택을 마주한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죄를 지을 가능성이 0보다 크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실패의 누적은 피하기 어려운 필연에 가까워진다.
극도로 보수적인 가정 아래에서도 죄 없는 삶은 통계적으로 기적에 가깝다. 그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본성을 넘어서는 설명을 요구한다.
예수님의 죄 없는 삶은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의 주장에 그치지 않는다. 이 모델의 가정 아래에서 그것은 인간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한 삶이며, 그 압도적인 불가능성은 성경의 증언을 더욱 진지하게 바라보게 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단지 탁월한 인간이 아니라 참으로 신적인 분이셨다는 믿음과 일치한다.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이를 고백해왔으며, 현대의 인지과학과 행동과학은 이 주장이 왜 깊이 숙고할 가치가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 증거가 성경의 증언과 부활, 예언의 성취,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격에 관한 다른 증거들과 함께 고려될 때, 그분의 신성은 죄 없는 삶을 가장 일관되게 설명하는 결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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