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소식이 지구촌을 흔들고 있다.
다니엘 선지자는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단 9:26)라 했고
사무엘 선지자는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삼상 17:47)이라 했으며
다윗은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 24:8)라 했다.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도 당대 최강국 엘람왕(현 이란 땅) 그돌라오멜 연합군에 잡혀가던 조카 롯 가족을 가나안 북쪽 단까지 추적하여 구출해왔다.

​대한민국은 종전국가가 아니다.
여전한 휴전 국가다.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잊혀진 전쟁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 조국의 이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움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우리 모두는 자유에 빚을 졌다.

전쟁기념관에서
전쟁기념관에서

젊은이들은 지금 대한민국을 "중공 강점기"라 말한다.
주한미군 주둔 방어 비용이 약 1조원 가량인데
중국인 의료혜택급여는 1조원이 넘는다.
실업 급여도 편취하고 있다. 도대체 이런 법을 누가 법제화한 것인가?
중국인들이 공무원도 되고 변호사도 되며
대한민국 명문대 의대, 법대에 특혜로 입학을 하고 있다.
우리 국민들도 중국에서 그런 혜택을 받고 있나?
국립 서울대에 건국·전쟁 영웅실은 없어도
6.25 전쟁 당사국 중공의 시진핑 기념실이 버젓이 운영되고 있는 한심한 국가다.
이런 매국이 어디 있나!
대한민국 주권이 침탈되고 있다.
친일매국보다 더한 중국에 부역한 매국정치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왜 이런 일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난무하고 있을까?
공정에 민감한 청년들이 분노하고 있다. 친중매국노들을 밝혀내야 한다.

전쟁기념관 광장에서
전쟁기념관 광장에서

신앙도 일종의 선한 싸움이다(딤후 4:7).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고
블레셋 무리를 우리의 손에 붙이셨다 했다(삼상 17:46-47).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내가 하나님의 진리의 모든 부분을 가장 큰 목소리로 고백하며 가장 분명하게 강론할지라도, 그 순간에 세상과 마귀가 공격하고 있는 바로 그 작은 요점을 빼놓는다면, 내가 아무리 담대하게 기독교를 고백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군인의 충성심은 전투가 치열한 곳에서 입증된다. 만일 그 한 지점에서 주춤한다면, 모든 전장에서 굳건히 버티는 것은 그에게 그저 패주와 수치일 뿐이다.”라 했다.

​3.1 운동도 종교인들이 주도한 운동이었다.
그것도 기독교인들이 압도적인 다수였다.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다.
누가 진정한 애국자일까?

여기 항일구국투사의 아들들로 귀한 6.25 전쟁의 영웅 형제를 소개한다.

국가유공자 형제
국가유공자 형제

"호국영웅의 고장, 괴산을 빛낸 용감한 국가유공자 형제"
국가유공자 전 괴산 문광면장(文光面長) 의송(毅松) 조용국(趙容國)과 전 음성군수(陰城郡守) 조용권(趙容權)
'한민족 3천년 교육사 최고의 교육자' 송남 조재삼 선생의 직계 후손
조찬영 목사의 부친과 작은 아버지

​충북 괴산은 호국영웅들을 무수히 배출한 충절의 고장 충청에서도 단연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육군학생군사학교가 괴산에 자리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의송(毅松) 조용국(1929년생)과 조용권(1932년생)은 괴산 문광에서 항일구국투사(抗日 救國鬪士) 조충식(忠植)과 나주임씨(羅州林氏) 사이에 태어났다.

1946년 8월 27일 부친(父親)이 세상을 떠나고 1946년 12월 3일 조부(祖父)이신 한탁옹(漢濯翁)이 세상을 뜨셨으니 어린 나이에 가족을 부양하던 중, 1950년 6. 25사변을 맞는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危機) 속 祖國의 앞날을 보시고, 펜을 던지고 백척간두의 위기에 선 국가를 수호하고자 낙동강 전투에 참전하는 등 작렬하는 포연탄우(砲煙彈雨) 속 두 형제는 학도병(學徒兵)으로 참전한다. 구국의 화신으로 철전을 치루다 그만 두 형제는 목숨이 위험한 큰 부상을 당하였다. 용권은 전공(戰功)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였다.

먼저 동생 용권이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야전병원 병상에서 치료 중 우연히 후송되어온 부상자를 보니 형이 아닌가. 죽어가는 형을 붙잡고 눈물을 흠벅 적신 후 정신을 차려, 군의관을 찾아 최선을 다해 치료해 달라 간청하며 형의 옆을 지키며 간병한다. 구사일생으로 치료가 되어 형은 부상병으로 의가(醫家) 제대를 하였다.

​그 후 형 용국은 다친 몸으로 1962년 괴산군 문광면장을 역임하시고, 1967년 괴산군 문화공보실장, 그 후 1970년 사무관으로 승진하여 괴산군 식산 과장을 역임하던 중 항시 조국(祖國)의 부흥 발전(復興 發展)과 지역민 화합에 앞장서시었고 재건(再建) 새마을 사업에 몸소 적극적인 참여하다가 과로로 인한 숙환(宿患)으로 1973년 1월 24일 일찍 세상을 뜨셨다.

국가유공자
국가유공자

형 용국은 가정 유훈(家庭 遺訓)을 통해 늘 가정과 선조(先祖)에 대한 자부심(自負心)과 자긍심(自矜心)으로 자녀들을 교육,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와 가족을 위하여서는 나보다 동생을 아껴주시고 나누어 주심에 형제애를 나타내 보이셨다. 마을에 대한 애향심으로 젊은 나이에 마을에 다리를 놓고 하천에 제방을 쌓는 일에 앞장 서 지금 문광면 전법 앞 제방 시설을 설치하였다.

​동생 용권은 장교 예편 후 공직에 투신한 후 전후복구와 산업건설, 행정체제 정비 등 국가발전에 진력하여 1960년 충주시 양정계장을 시작으로 병사, 사무, 시정계장과 시민과장, 단양군 재무과장과 내무과장, 충청북도 교무, 운수, 양정 과장, 도 도로관리사업 소장, 충청북도 도민 교육원장, 충주시 부시장, 충청북도 지방공무원교육원장, 충청북도 보건사회국장, 음성군수, 충청북도 농림수산국장 등을 차례로 역임한 후 정년퇴임 했다. 80이 넘으신 필자의 누님(순복음교회)께서는 충주 시청에서 근무하실 때 함께 계셨던 용권 계장님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계신다.

조용권의 묘
조용권의 묘

국가 유공자 용권은 그간 화랑 무공 훈장 수훈(보훈번호 290295) 대통령, 국가 유공 포훈, 녹조근정 훈장(1987.12 교육원장) 등 많은 표창을 받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시고 2009년 3, 11일 향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묘지는 대전 현충원에 있다.

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이 두 형제는 조선의 천재 성리학자 졸수재 조성기의 아드님으로 괴산 군수를 역임한 가림공 조정례의 후손이다. 또한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과 더불어 조선 3대 유서(일종의 오늘날 백과사전)인 송남잡지의 저자 조재삼 선생의 4대 직계 후손이다. 자녀 교육을 위해 의도적으로 편집된 '송남 잡지'의 저자 조재삼 선생에 대해 경희대 최원재 교수는 지난 2022년 학술 발표에서 "우리나라 3천년 교육사 중 내가 아는 최고의 교육자"라며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정보와 빅데이터가 중요시되는 만큼 우리의 전통교육법인 백과사전식 통교육을 되살려 자라나는 세대가 미래사회를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송남잡지'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어 놀라움을 안겨준다. 당시 천주교는 성리학의 국가 조선에서 배척대상이었고 개신교는 아직 전파되지도 않았던 시기였다. 서슬 퍼런 유교 국가에서 아마도 기록으로 남긴 기독교(야소기독耶蘇基督)에 대한 최초 공식 언급으로 보인다. 직계 후손이신 송남연구소 소장 조찬영 목사는 박학다식했던 송남(1808~1866)이 개신교(한반도에 대한 개신교 공식 선교는 1885년)를 접했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전하고 있다.

​현재 괴산 문광면 대명리 소재 송남연구소의 소장으로 있는 조찬영 소장의 부친이 바로 국가유공자 의송(毅松) 조용국(趙容國) 전 괴산 문광면장(文光面長)이다. 조 소장은 순복음 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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