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전한 부활

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바울이 받은 것을 ‘먼저’ 전했다는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에 교회를 개척할 때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신자도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그 진리를 의심하느냐, 말하자면 이 땅이 전부이고 부활이 없다고 믿었던 이전의 이방인 시절로 돌아가려 하느냐고 꾸중한 것입니다. 나중에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고 다그쳤는데(12절), 시신도난설 같은 것을 퍼트리는 교회 안팎의 거짓 선생에 절대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의 역사성만 입증하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 권면 훈계하는 중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교회 안의 여러 문제가 따지고 보면 부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이 부활 논증의 결론 격으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라고(19절) 선언한 까닭입니다.

세상 삶뿐이면 우리가 더욱 불쌍할 것이라고 했으므로 현재의 고린도 교인들의 처지가 실제로 세상 사람에 비해 불쌍한 상태라고 전제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그들보다 절대 불쌍하지 않고 오히려 더 축복받은 상태라는 것, 최소한 부활을 확보했기에 그 불쌍한 상태를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불신자는 세상만 목표 삼아 살기에 세상에서 형통 출세만 구하지만, 신자는 천국을 목표로 세상 죄악에 휩쓸리지 않고 거룩하게 걸어가기에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불쌍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너희가 부활을 온전히 믿는다면 교회 안에 그런 문제들이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끼리도 남들보다 자기가 높아지려 드니까 파당을 조성하고, 세상 사람처럼 음란죄를 범하며, 성경 진리에 따라 교회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하고, 우상에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로 믿음의 우열을 따지고, 과부나 불신자와의 결혼 문제를 두고 시끄러워지는 그런 일들이, 신자가 되어서도 세상적인 삶을 살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한 탓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지금 부활이 없기에 이 땅이 전부인 양 사는 불신자와 똑같지 않으냐고 꾸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장 먼저 너희들에게 부활 신앙부터 심어주었다고 새삼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지금 저도 부활을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드리는 중입니다. 신자라면 반드시 부활의 증인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진실성을 논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합리적으로 변증해 주어도 이 땅이 전부인 자에겐 씨도 먹히지 않습니다.

삶에서 부활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 앞에 보여야 합니다. 바울, 베드로, 스데반을 비롯해 초대 신자들은 그렇게 살다가 거의 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순교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에겐 그런 식의 노골적이고 강압적인 박해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을 쫓지 않고서 그들의 죄악에 동참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이런저런 손해와 희생이 따릅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어떤 처지에 빠져도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첫째 뜻은 사탄과 그의 온갖 시험 유혹 훼방 등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의 정죄가 없이 영생이 확보되었으므로 죄의 문제에서도 실질적으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이 완전히 의롭게 되지 않아서 눈앞의 유혹과 자기를 높이려는 욕심에 져서 때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도, 죄에 대한 근본적인 반응은 완전히 바뀌어져야 합니다. 십자가 주님께 실토하면 깨끗이 용서받을 수 있으며, 그 전에 매일 성령의 충만한 인도를 구하면서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면 죄에 계속 패배하지 않고 점점 승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원토록 내주하신 성령이 범사를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기에 어떤 현실적 환난에도 염려할 필요가 없어지고 평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자기들보다 훨씬 불쌍하고 엄청난 고난을 겪고 있는데도 평안을 유지하니까, 그들이 먼저 “너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너희가 믿는 믿음과 그 대상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부활이 없다면 가장 불쌍하지만, 부활이 있기에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아가 바울이 엄청난 고난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감내한 까닭을 아셔야 합니다. 부활 소망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알게 해주려는 열정, 그것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 복음과 부활의 영광이 너무 귀하고 귀해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 같은 선교사는 될 수 없어도, 자기가 처한 곳의 선교사는 될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최소한 현실의 삶에서 평안은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에겐 부활은 더 이상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장차 반드시 실현될 확실한 증거로 소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이 증언하고, 특별히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몸소 직접 보여 주었습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걱정이자 고민이자 대적인 죽음도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는데 다른 어떤 것도 두려울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런 당당한 자신감이 바로 믿음입니다.

매년 닥치는 부활절에 주님의 부활 사실마저 확신하지 못한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온전히 믿지 않아서 구원의 언저리만 맴돌고 있는 셈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으면 신자들의 천국 입성도 당연히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한 가지만 스스로 자문해 보십시다. 이 땅에서의 현실 삶이 세상 사람에 비해서 아주 불쌍해도 부활을 알고서 이미 소지하고 있기에 하나도 부끄럽거나 꿀리지 않으며 오히려 더 기뻐하고 그들 앞에 평안과 기쁨으로 대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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