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에게도 나타났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의 부활을 신자에게만 보여 준 것이 아니고 최악의 불신자였던 바울에게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주님을 만났을 때는 주님의 가장 큰 대적이었습니다. 그는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고백합니다. (6절) 자기는 다른 사도나 형제들처럼 주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했고 부활하신 주님도 직접 뵙지 못했기에 칠삭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자기를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직접 만나주려고 영계인 천국에서 찬란한 광채 가운데 하늘로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성자 하나님으로서 하늘로 복귀하신 주님은 바울에게 형벌은커녕 꾸중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금식기도원에 들여보낸 것처럼 사흘간 봉사를 만들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 당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시간을 주었습니다. 바울로선 가장 먼저 예수님이 생전에 예언한 대로 무덤에서 부활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고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가 나사렛 예수 일당을 극렬히 핍박한 까닭 중 하나가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서 숨기고선 부활했다는 거짓말을 퍼트렸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호와를 위해서 그런 사기꾼 집단을 그대로 두어선 절대 안 된다는 열정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처형을 주도한 스데반이 운명하기 직전에 “인자이신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행7:56)라고 소리칠 때 더더욱 반감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돌로 처맞으면서도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평안하게 자기 죽음을 예수님께 의탁했고 나아가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까지 했습니다. 바울로선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고 혹시라도 스데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신성모독 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기가 하나님 보좌에 돌을 던진 꼴이라는 걱정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 염려를 지우지 못하고 있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자기는 사흘 간 장님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자기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지켰던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고서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는 루머를 퍼트리게 했다는 항간의 소문도 사실이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칠삭둥이라고 표현한 또 다른 이유는 어리석게도 그런 거짓 루머에 속아넘어갔다는 뜻일 것입니다.
바울은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지금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담대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대중 앞에 ‘짠’하고 당신의 부활을 보여 주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정반대로 당신의 가장 큰 대적을, 그것도 딱 한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증인으로 세웠습니다. 가장 심한 병을 앓은 자가 기적적으로 낫거나, 가장 큰 죄인이 십자가 용서를 받으면 그 은혜를 가장 크게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바울로선 그 절대적 믿음이 완전히 무너지자, 정반대로 절대적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부활의 파급력
증인으로 법적 효력도 갖지 못하는 여인들에게서 무덤이 비워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베드로가 가장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했던 잘못이 생각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이 세 번의 문답으로 그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당신의 양 떼를 먹이라는 사명까지 주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아서 주님의 예언대로 담대해지자 곧바로 성전으로 뛰어가 부활 예수를 전하고 복음을 선포하여 그날 하루에 삼천 명을 회심시켰습니다. 부활 예수님은 당신이 성전 한 복판에 나타나는 대신에 수제자를 당신의 증인으로 그곳에 세운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원수였던 바울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할 사도로 맨 마지막에 세워주었습니다. 바울도 죽은 것과 방불한 흑암에 갇혀 있다가 사흘 만에 빛을 보게 되자 곧바로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신자들을 핍박하러 갔던 바로 그 다메섹에서 거꾸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온 메시아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최측근이었던 베드로 한 명과 최고로 멀리 떨어진 대적이었던 바울 한 명을 당신의 부활을 증언할 최적의 일꾼으로 세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 주님이 게바에게 먼저 보이시고 마지막에 자기에게 보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이 마지막 증인이 되지 않았다면 시신도난설을 완전히 잠재울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리새인 랍비 바울의 결정적인 증언이 그 루머를 조작했던 대제사장들을 완전히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스스로 살아날 것이라고 미리 가르쳤고 또 실제로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 전에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지 나흘이 되면 그 영혼이 음부로 완전히 내려간다고 믿었습니다. 주님이 나사로를 소생시켰다는 것은 당신이 영계까지 통치할 수 있는 존재, 즉 하나님이라고 증명한 셈입니다. 그 사건은 유대인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고 대단한 감동으로 다가왔기에 많은 이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본격적으로 예수님은 물론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살아 있는 증인이 된 나사로도 함께 죽이려 들었습니다.
나사로 사건은 주님이 십자가 처형 직전의 마지막 기적이었습니다. 지금껏 예언해 온 당신의 부활이 말로 그치는 종교적 구호가 아님을 미리 확인해 준 셈입니다. 그때 주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라고 가르쳤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이 말씀 또한 절대적 진리로 입증되었습니다. 거기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긴 해도 육신으로는 마리아에게서 나서 이 땅에서 완전한 인간으로서 일상의 삶을 자기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를 믿는 제자들로선 자기들의 부활도 당연하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도 경비병을 통해서 주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엄청난 파급력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경비병들의 입을 돈으로 막고서 거짓으로 사태를 무마해 보려 했으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정도도 안 되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도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너무나 엄청나고 기쁜 소식인지라 가장 먼저 “예수가 부활했고 하늘 보좌 우편에 좌정해 계신다. 그를 믿으면 우리도 부활할 수있다.”라고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인해서 기독교는 아무도 막지 못하는 염병처럼 로마 제국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신약성경이 아직 완비되기 전이었음에도, 초대교회 신자들의 믿음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아주 견고했습니다. 자기들도 죽으면 예수님처럼, 그 확실한 증거인 나사로를 보았으니까, 부활할 수 있다는 아주 단순한 믿음이었습니다.
받은 부활 증거
바울은 그래서 고린도 교인에게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합니다. (3절) 그가 전한 것은 이어지는 설명대로 주님의 부활 사실과 그 영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자기도 그것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부활 예수님을 직접대면했지만, 혹시 자기가 본 것이 환상이 아닐지 사도들에게 물어봤다는 뜻입니다. 사도들로부터 부활 주님과 사십일 간 교제하다가 감람산에서 승천한 것을 목격한 것까지 구체적으로 생생히 전해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에게 안수해서 광명을 되찾게 해준 아나니아도 부활 증인 오백 형제 중 한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따져 봐도 바울이 눈을 뜨자마자 아나니아에게 자기 경험을 설명하고서 주님의 부활 여부를 확인했을 것 아닙니까? 또 그래서 바울은 부활 증인이 아직 많이 살아있으니까 고린도 교인들더러 부활이 궁금하면 나보다도 그들에게 확인해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증언했습니다. 특별히 ‘만진 바’라고 말한 것은 도마가 주님의 손바닥 못 자국과 허리 창 자국을 확인해 봤다는 뜻일 것입니다. 주님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바울이 본문에서 설명했듯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주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믿어야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지 따져봐야 아무 소용 없으므로 그런 기사의 상징적 의미만 믿으면 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성경대로 부활을 무조건 믿어야지 의심하면 안 된다는 복음주의자들의 말도 사실상 틀린 것입니다. 상징적 의미가 진리가 될 수 없으며, 의구심을 품고서 믿는 것은 엄밀히 말해 맹신입니다. 둘 다 최대한 잘 봐주어야 자기가 믿을 수 있는 것만 골라 믿는 셈인데 그것은 자신이 성경을 저작하는 큰 죄입니다.
작금 젊은이들이 자꾸만 교회를 떠나고 있는 데는 기성 신자들의 이런 반지성적인 태도도 크게 한몫을 차지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자 절대적 진리라는 기초 위에서만 유효합니다. 성경의 진술이 이성적 접근을 배제하는 황당한 옛날이야기가 절대 아닙니다. 거짓말은 믿어서도 안 되고 그래 봐야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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