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 시인
유치환 시인 ©위키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1908 ~1967)은 경남 통영 생, 극작가 동랑(東郞) 유치진(柳致眞)(1905~1974)은 그의 형이다. 다양한 문화예술인을 배출한 통영의 충무교회 출신의 시인 겸 교육자였다.

청마 유치환하면 생명, 허무, 의지라는 세 단어가 떠오른다. 사춘기 시절 책상 앞에 청마의 '바위'라는 시를 써 놓고 늘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詩도 의지, 생명, 허무가 어우러진 시라는 생각이 든다. 조상기 시인(전 동덕여대 교수, 인문대학장, 대학원장, 1938-2000)은 청마의 초기 시를 다룬 박사 논문에서 청마에 대해 "인간의 본원적 문제를 남성적 시풍으로 제시함으로써 한국문학사에 중요한 흐름을 이루어놓은 시인"이라 했다. 또한 초기시에 대해 "대표하는 시집은 『靑馬詩抄』와 『生命의 書』로, 『靑馬詩抄』에서는 일제 탄압에 맞서 대항하지 못한 회한과 내적 갈등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生命의 書』에서는 가열한 생명의지로 자신을 극복하려는 신념과 북만의 대자연 속에서 마주친 허무를 초극하려는 의지가 주요 관심이 되어 있다."고 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하는 '행복'이라는 본 시의 모티브는 분명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하심을 전하는 장면을 오버랩하게 한다. 성경은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행 20:36,37) 근심하며 전송했다고 전한다. 필자는 이 구절을 1990년대 말 2년 여 사도행전 수요 강해시 설교하며 목이 메였던 적이 있다. 결국 폐허가 된 밀레도와 그곳 역사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보기도 했다.

은유에 능한 시인이었던 청마는 1953년 『예루살렘의 닭』이라는 수상록을 펴냈다. 거기에 표제작으로 실린 글에서 청마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오늘도 너는 조소와 모멸로써 침 뱉고 뺨치며 위선이 선을 능욕하는 그 부정 앞에 오히려 외면하며 회피함으로써 악에 가담하지 않았는가. 새벽이면 새벽마다 먼 예루살렘성의 닭은 제 울음을 길게 홰쳐 울고 내 또한 무력한 그와 나의 비굴에 대하여 죽을상히 사무치는 분함과 죄스럼과 그 자책에 눈물로써 베개 적시우노니."

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가야바 대제사장 집터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 시온산 중턱의 베드로 통곡교회에는 돔 위에 닭 형상이 이채롭게 우뚝 서 있다. 이 교회 관리인이 필자 장녀가 분실했던 회색빛 보온 물통을 수류탄(?)이라 의심하여 곤혹스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에피소드로 끝났으나 이스라엘이 늘 긴장 속에 있는 국가임을 실감한 계기가 되었다. 이 귀한(?) 보온병은 결국 또 다른 긴장의 현장인 헤르몬 산과 골란 고원을 가다가 끝내 분실하였다.

​인간은 얼마나 선악의 투쟁과 위선 가운데 살아가던가. 청마의 시에도 늘 그런 그림자가 보인다. 사람들은 청마의 친일 행적과 이영도 시인과의 플라토닉 러브에 대해 그를 자주 비판의 중심에 올리기도 한다. 율법에 충실했던 사도 바울이 고백하듯 예수 그리스도 말고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에 대해서도 밧세바의 일을 제외하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 했다.

​필자는 청마의 허물을 들추어 논하고 싶지 않다. 다만 조상기 시인의 "일제말 한국문학사의 공백을 메꾸어나갔다는 점과 생명의 구경적 탐구, 허무의지와 같은 본원적 주제를 탐구함으로써 한국시의 기반을 확장했다"는 청마에 대한 평가를 남긴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작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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