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6월 1일 자 주간 『리포지터리』
마지막으로 발행된 1899년 6월 1일 자 주간 『리포지터리』 첫 페이지.

맺음말

1892년 1월 올링거(F. Ohlinger) 부부가 창간한 한국 최초의 영문잡지 『리포지터리』는 배재학당 내에 소재하고 감리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삼문출판사(Trilingual Press)에서 발행되었으며, 올링거 부부가 한국을 떠남에 따라 2년간 휴간을 하게 되었다.

 

1895년 『리포지터리』 속간 때부터 공동편집자를 맡았던 아펜젤러와 존스는 미국 출신 선교사들로서 한국 최초의 사립학교를 설립해 운영했으며, 인문학의 소양이 풍부했고 또한 한국의 문화와 역사 연구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1899년 『리포지터리』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이들 공동편집자의 글이거나 그들이 여러 국내외 매체에서 발췌한 글들이다. 그 한 예로, 필자가 발굴한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방문기’ 친필 원문과 『리포지터리』에 게재된 내용을 비교해 보니, 편집자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가 수정하고 다듬어 편집14)한 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히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에는 사역 현장에서 보내온 선교사들의 생생한 동정을 “CITY AND COUNTRY”에 게재했다. 주간 형식으로 마지막 발행된 6월 1일 자 17호에는 『리포지터리』 폐간에 관한 공지를 “FINIS”, “BUSINESS NOTICE”, 그리고 “NOTICE” 이렇게 무려 3차례나 알렸고, 폐간 후 독립신문과 합병 형식으로 편집권과 경영권을 넘긴다는 소식을 볼 수 있다.

 

엠블리
1899년 『리포지터리』가 독립신문에 합병되면서 편집장을 맡았던 엠블리(W. H. Emberley)와 그의 자녀들. ©Burton Holme Travelogues(1908)

이처럼 선교역사(宣敎歷史)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문화사에 귀중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금년 4월까지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의 행방을 쫒아 연구한 학자들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지금까지 발간된 책이나 논문들에서 『리포지터리』에 관해 여러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오류의 원인은 바로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 존재를 선행 연구자들이 몰랐고 그 자료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에 더하여 이러한 귀중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공공기관이나 도서관, 연구소 등에서 연구자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놔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는 오래전 2002년도에 연세학술정보원 고문서자료실에서 입수해 있었지만, 거의 20여 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서고에서 잠자고 있었다. 『리포지터리』 Vol. Ⅰ.~Vol. Ⅴ.까지는 연구자들이 여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인본이나 온라인 도서관에서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유일하게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를 보유하고 있는 연세학술정보원 국학자료실의 자료 검색시스템의 한계로 인해 이를 활용할 수 없었던 것도 또 하나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두에서 필자는 이 글을 쓰는 목적이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가 연구자들에게 인식되지 못해 연구할 수 없었던 구조적인 문제를 살펴보고, 그러한 문제를 개선할 방안을 찾고자 함에 있다고 했다. 이제 결론적으로 그 개선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엠블리
독립신문이 대한국 정부가 인수하여 1899년 12월 4일 자로 폐간되자 엠블리는 서울역 앞에 한식 가옥을 사들여 개조해 ‘스테이션 호텔(Station Hotel)’을 운영했다. ©Burton Holme Travelogues(1908)

첫째로, 필자의 생각은 도서관의 목표는 희귀한 자료를 많이 소장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은 양의 자료라도 여러 연구자나 관심 있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많이 활용할 수 있는 지원을 해주는 것이라 주장하고 싶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먼저 국내에서 유일하게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를 보유하고 있는 연세대도서관에 경의를 표한다. 도서관에 입수된 자료를 온라인 서비스로 볼 수 있도록 한다든지, 아니면 영인본을 제작해 여러 도서관 및 연구기관에 배포해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잡지인 『리포지터리』 연구의 활성화에 기여해 주기를 바란다.

 

둘째로는, 기존 『리포지터리』의 기록 중 전체 내용이 번역된 것은 없고 대부분이 주제별로 연구자들의 필요에 의해 부분적으로 번역된 자료가 있을 뿐인데, 이에 대한 양질의 번역작업이 필요하다. 정부에서 진행하는 국학 관련 번역사업의 대부분은 ‘한문 자료’ 번역에 치우쳐 있고 근대 개화기에 생성된 영문, 불문, 기타 외국어 자료의 번역 사업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뿐만 아니라, 인문학연구소, 국학연구소, 일반대학에서 영문잡지인 『리포지터리』에 대한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관련 기록의 번역과 원문 서비스가 원활히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내 도서관이나 연구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러한 고문헌 자료로 분류된 발행 도서들을 수장고에 고이 간직하기보다는 당시 저자들의 유산에 연구자들이 더 쉽게 접근하고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기를 요망한다.

현재 여러 국책 연구기관과 도서관에서 소장 자료 공개 및 열람에 폐쇄적인 방침을 시행하고 있는데, 이를 사용자들이 더 쉽게 자료를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자료를 구할 수 있도록 인적, 물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바란다.

글로벌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판매하고 있는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 영인본/복사본이 한국 도서관에서는 아직까지 영인본 재발간 또는 전자 자료의 제작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지 않은 것은 개선이 필요한 사항이다.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 자료는 출판된 지가 오래되어 저작권 문제에도 자유롭지 않은가?

오랜 세월 빛을 보지 못한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 자료 전체가 조만간 관련 도서관에 입수되어 연구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연구 활성화에 도움이 되기를 기원하며 이 소고를 마친다. <끝>

[미주]
14)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시 피터스가 영어를 배운 지 4년밖에 되지 않아 그는 문법적으로 완벽한 글을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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