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런 홀
애런 홀.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애런 홀의 기고글인 ‘왜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 항상 급하게 행동하시는가?’(Why is Jesus always in a hurry in the Gospel of Mark?)를 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애런 홀은 앨라배마주 대프니에 있는 주빌리 시티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마가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읽어본 적이 있다면, 단 한 단어가 깜빡이는 불빛처럼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로 “곧”(immediately)이라는 단어다.

마가는 이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무려 마흔 번이 넘는다. 처음에는 주의력이 짧은 저자처럼 느껴지거나, 그냥 빠른 장면 전환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가는 참을성이 없어서 서두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도래가 움직임을 요구하기 때문에 급하다. 복음이 움직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은 네 복음서 중 가장 짧지만, 무게감과 긴박감은 누구보다 강렬하다. 마가는 긴 연설이나 복잡한 족보를 주지 않는다. 대신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한 진리를 보게 한다. 예수님이 한 순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순간 자체가 전환점이 된다. 멈춰 있던 것은 다시 움직이고, 깨져 있던 것은 치유되기 시작하며, 어둠은 빛으로 향해 움직인다.

‘곧’이라는 단어는 이야기 속에서 신학적 닻(anchor)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조용히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권위로 돌파해 들어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항상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마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임재가 여전히 그런 임팩트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초대한다.

예수님의 임재는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마가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가는 ‘곧’이라는 단어를 통해 예수님의 권위를 모든 영역에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단지 육체적 치유만이 아니라 영적 자유, 정서적 회복, 심지어 피조세계조차 예수님께 반응한다.

마가복음 1:31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그분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곧 떠나고 그녀가 그들을 섬겼다.” 이것은 단순한 치유가 아니다. 온전한 회복이다. 방금 전까지 누워 있었는데, 다음 순간 이미 목적을 향해 일어서 있다.

마가복음 1:42에서는 나병 환자가 등장한다.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층의 변화가 있다. 육체적 치유, 사회적 회복, 정서적 자유, 수년간의 고립이 단 한 순간에 무너진다.

영적 세계도 즉시 반응한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꾸짖자(1:25–26), 영은 지체 없이 떠난다. 협상도, 지연도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어둠이 물러난다.

이 장면들은 예수님이 힘을 모으기 위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분의 권위는 과정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즉각적이다.

물론 우리의 삶에서 항상 이런 즉각적인 일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능력은 제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다.

‘곧’이 항상 ‘즉시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여기에 살고 있다. 성경에서 보이는 즉각적인 역사와 우리의 현실 사이의 긴장 속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능력의 주이심을 믿지만, 때로는 치유가 더디고, 돌파는 과정 속에서 일어나며, 기도는 기다림을 통과해 응답된다.

마가도 이 사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제자들이 오해하는 순간도 있고, 무리들이 기다리는 순간도 있고, 믿음이 시험받는 장면도 있다. 마가는 즉각적인 해결을 약속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도래가 곧 결정적 순간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야이로의 이야기 속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기적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 기적이 한 걸음 한 걸음 진행되었을 뿐이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치유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녀가 완전히 자유를 느끼기 전부터였다.

우리 역시 그렇다. 예수님의 임재는 환경이 즉각 변화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이미 역사하고 계심을 보증한다. 때로 기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모든 것이 변하는 순간이 아니라, 주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확신이다.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고, 강하게 하며, 과정 속에서 우리를 지탱하신다.

예수님의 임재는 여전히 ‘곧’ 찾아온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진리 중 하나는 히브리서 13:8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

마가복음에서 권위와 긍휼로 움직이신 그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시간이 걸릴 수 있어도, 내면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 일어날 수 있다.

그분의 평안은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분의 위로는 완벽한 상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분의 임재는 속삭이는 기도만큼 가까이 있다.

빌립보서 4:7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안이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이 평안은 상황이 해결된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순간 한가운데서 우리를 붙든다. 기적은 돌파일 수도 있고, 계속 믿을 힘일 수도 있다. 둘 다 거룩하고, 둘 다 선물이며, 둘 다 하나님에게서 온다.

기다림의 계절을 지나고 있는 당신에게

아마 지금 질문을 품고 있을 수도 있고, 지쳤을 수도 있고, 겨우 희망을 붙들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들었으면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통에서 멀리 계시지 않다. 그분은 당신의 아픔에 무관심하지 않다. 그분은 느슨하게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 곧, 즉시 말이다. 그분은 즉시 가까이 계시며, 당신이 보지 못하는 사이에도 이미 일하고 계신다.

마가복음은 우리의 이야기 속으로 권위와 긍휼과 목적을 가지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신뢰하라고 초대한다. 당신은 모든 것이 괜찮은 척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분이 여기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그리고 그 임재는 모든 것을 바꾼다. 즉시 움직이시던 그 예수님은 오늘도 움직이신다

그러니 오늘, 눈을 들어라. 숨을 고르게 쉬어라. 지금 당신이 있는 그 순간에 예수님을 초대하라. 정리된 버전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순간 말이다. 병든 자를 고치고, 폭풍을 잠잠케 하고, 어둠을 꾸짖고, 상처 입은 자를 곧 회복시키던 그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의 삶에서 움직이고 계신다.

상황은 즉시 변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분의 임재는 즉시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 즉각적인 가까움이 때로는 다음 기적이 오기까지 당신을 붙드는 힘이 된다. 그분은 당신과 함께하신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일하신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의 이야기 속에서 움직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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