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평 박사   ©평택대

[기독일보] 과거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에 대한 조선인들의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 바뀌어 나중에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발전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 그러한 기독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인식 변화를 보여준 한 논문이 발표됐다. 권평 박사(평택대 겸임교수)가 발표한 "황현(黃玹)의 '매천야록'과 시대인식의 변화"가 그것이다. 논문 발표는 11일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사무실에서 있었다.

권평 박사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에 대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 근대사의 격동기를 지나면서 통렬한 필치로 당대의 기록을 남긴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황현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되자 그 해 9월 10일, 절명시(絶命詩) 4수(首)를 남기고 자결한 순국지사(殉國志士)로 널리 알려져 있고, 1960년대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여러 면에서 긍정적으로 연구됐다.

이를테면 정우봉은 그가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을 '근대 전환기 역사기록의 보고'(寶庫)로 정의했고 김창수는 '민족의식에 투철했던 역사가'(歷史家)로 규정했다. 권평 박사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은 1864년부터 1910년 국권이 상실되어 그가 자결하는 날까지 날카로운 필치로 남긴 당대의 기록으로 당시의 시대상과 인물, 사건 그리고 시대에 따른 변화를 잘 보여주는 기록물"이라며 "그동안 역사학적인 면에서, 문학적인 면에서 그리고 당대의 시대인식 등 여러 측면에서 연구됐다"고 했다.

사대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던 황현은 일본과 러시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그는 '오하기문'(梧下記聞)의 서설에서 당파로 말미암아 유학이 쇠퇴하였고 또 그로 인해 괴상하고 황탄한 사설(邪說)인 천주학(天主學)이 들어왔다고 봤고, 그 신자들은 "오직 콩과 보리도 분별하지 못하는 부녀자와 아이들 그리고 천한 무리들"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더불어 그는 대원군이 한 일 가운데 천주교도를 모두 잡아 죽인 일을 '가장 통쾌한 일'로 평가할 만큼 천주교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사람들의 이목이 바뀌고 사상이 새로워지는 등 새롭게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그의 의식도 서서히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권평 박사는 "황현이 이 글을 기록한 시기가 광무(光武) 10년(1906년), '정말로 많이 달라진' 세상이라고 그가 기록한 것처럼 달라진 것은 세상만이 아니었다"며 "세상이 달라진 그만큼 황현의 시대인식이나 기독교, 신학문, 서양에 대한 인식과 시각도 달라졌다"고 했다. 우선 황현은 영국인 배설(裵說; E.T.Bedell)과 <每日新聞>의 창설 그리고 그와 연관된 이야기를 한 페이지가 넘게 기록할 만큼 서양에 대해서, 서양의 인물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권평 박사는 "서구, 서양에 대한 황현의 이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된 것은 먼저 일본의 침탈이 더욱 노골화, 구체화하며 그 강도(强度)를 더해갔기 때문"이라 했다. 이런 치욕과 침탈을 겪으면서 황현은 자연히 일제의 침탈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는 운동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의 관심은 일본이 가진 '힘'(경제, 군사력과 같은 power)의 근원에 대한 것으로 기울어졌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서구의 문명과 지식이 그 힘의 바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란 이야기다.

더불어 이러한 황현의 태도 변화에 대해 권평 박사는 "중국이나 서구열강에 의한 경제적, 군사적 침탈을 당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오직 일제(日帝)에 의해서만 침탈을 당했기 때문에 기존의 서구 열강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인식이 더 이상 부정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서양 문명의 통로로 여겨졌던 기독교(개신교)의 의료와 학교를 비롯한 여러 활동들이 그의 인식을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화시킨 것으로 여겨진다"고 했다.

또 권 박사는 "신문 등을 통해 변화된 시대 환경과 특히 기독교를 통해 유입된 발전된 문명의 도입은 황현의 사상과 시대인식, 세계관에 큰 변화를 야기하였고, 일제의 가중되는 침탈과 압박이 그의 서양과 신지식에 대한 수용을 가속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하고, "기독교, 서양, 신학문에 대한 황현의 인식의 변화는 1894년 동학과 청일전쟁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이라는 국가적 사건 등 역사적 사건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는데, 이런 사건들로 인해 기울어 가던 나라의 명운이 그의 시각에 커다란 변화를 줘서 서양에 대한 황현의 인식은 보다 긍정적으로 변했으며 지식의 분량도 점차 많아졌고 더 넓어져 갔다"고 했다.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황현의 인식은 YMCA나 병원, 학교, 의료와 같은 항목들로 인해 긍정적으로 변해갔으며 구세군에 대한 보도를 할 만큼 긍정적이었다.

권평 박사는 결론에서 "황현의 기록물들이 근세기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하나의 뚜렷한 자화상으로, 급격하게 국운(國運)이 기울어가던 시대에 그가 가졌던 시대인식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것이었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특히 서양 혹은 기독교, 신학문에 대해서, 매우 달라진 인식을 보여준다"고 밝히고, "황현의 기독교, 서양, 신학문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큰 변화를 보였다"며 "이러한 그의 인식의 변화는 당대의 국가적 안위와 관련된 사건을 통해서 크게 바뀌어졌음을 알 수 있고 이런 변화는 서양과 신학문 기독교 등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리고 인식의 폭과 깊이가 보다 정확하고 폭 넓게 바뀌었음도 알 수 있다"고 했다.

권 박사는 "이 같은 황현의 인식과 태도의 변화는 일제와 서양에 대한 왜양일체(倭洋一體)의 인식과 시각이 왜양이체(倭洋異體)로 변했음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날로 가중되는 일제의 침탈과 압박에 따른 새로운 출구 찾기였음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이러한 황현의 서양과 기독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선교사들과 서양 기독교인들의 의료와 학교, 언론 활동 등에 의해 영향 받았고 신문과 신학문 등을 통해 이루어진 서양의 새로운 학문과 지식의 보급에서 기인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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