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아놀드 작가
조슈아 아놀드 작가. ©washingtonstand.com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조슈아 아놀드 작가의 기고글인 ‘네팔·중국 홍수로 6,000명 사망·실종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6,000 are dead or missing in Nepal-China floods. What can Christians learn from this?)를 9월 2일 (현지시각) 게재했다.

조슈아 아놀드 작가는 워싱턴 스탠드의 선임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뉴스와 논평에 모두 기여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지난 수요일, 네팔과 중국의 외딴 산악 지역에 보기 드문 자연재해가 덮쳤고 사상자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피해 규모도 참담하지만, 재해가 발생한 방식 자체도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처럼 숙연해지는 순간, 성경은 비극 앞에서 인간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깊은 지혜를 건넨다. 전도서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번 비극 앞에서 우리 역시 잠시 ‘애통의 집’에 머물며, 그곳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수요일 현지 시각 오전 8시 37분경, 지진 관측 장비들은 네팔의 외딴 산악 지역에서 규모 4.4에 해당하는 진동을 감지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곧 이것이 지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엄청난 양의 얼음과 암석이 빙하에서 떨어져 나와 약 4,000피트, 약 1,200미터 아래의 협곡으로 쏟아져 내린 대규모 산사태였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이후 이 사건을 규모 5.2에 해당하는 산사태로 기록했다.

얼음과 암석 잔해는 무서운 속도로 계곡을 휩쓸었고, 좁고 험준한 지형에 있던 거의 모든 것을 매몰하거나 쓸어갔다. 네팔 카트만두에 본부를 둔 국제통합산악개발센터(ICIMOD) 과학자들에 따르면 트리슐리(Trishuli)강의 수위는 불과 30분 만에 약 27피트, 8미터 가까이 상승했다. 거대한 급류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150마일, 약 24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휩쓸고 간 것으로 전해졌다.

월요일 기준 네팔 당국은 903구의 시신을 수습했지만 약 4,250명이 여전히 실종 상태인 것으로 집계됐다. 중국에서도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했으며, 실종자 가운데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구조 작업은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네팔 당국은 두꺼운 진흙과 잔해에 막힌 산악 터널에 갇힌 수력발전소 노동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피해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앞으로도 추가 희생자가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참사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처럼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섣부른 해석이 아니라 함께 애통하는 것이다.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번 참사를 하나의 숫자나 뉴스 속 사건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가족과 친구, 일상과 꿈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가족들과 실종된 이들의 생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슬픔을 함께 품어야 한다.

동시에 이런 비극은 바울이 말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롬 8:22)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모든 고통의 이유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성경의 여러 인물처럼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탄식할 수도 있다.

성경적 믿음은 슬픔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울고, 질문하고,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면서도 그분을 붙드는 것이다.

자연재해 앞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창조 세계의 주권자이심을 믿는다. 자연의 힘은 인간의 통제를 훨씬 뛰어넘으며, 성경은 반복해서 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일깨운다.

욥기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물으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 이어 바다와 눈, 우박과 구름, 번개와 비에 대해 질문하시며 인간의 지식과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신다.

이 말씀의 핵심은 모든 자연재해의 구체적인 원인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나 특정한 목적과 연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재난이 발생했을 때 “왜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피해자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이런 일을 겪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예수님 역시 실로암 망대 사고를 언급하시며 희생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한 가지를 믿는다. 세상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우연만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리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욥은 거대한 상실 가운데서 이렇게 고백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이 고백은 고통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겠다는 믿음의 고백에 가깝다.

죽음은 언제나 예상보다 가까이에 있다

대형 재난은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삶은 생각보다 훨씬 연약하며 죽음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주 수요일 이전만 해도 빙하 붕괴와 산사태가 일으킨 거대한 홍수가 수천 명의 생명을 위협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수많은 예기치 못한 사건 앞에 노출돼 있다. 교통사고나 심장마비, 자연재해와 감염병처럼 죽음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는 목적은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도록 깨우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3장에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을 언급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예루살렘 주민보다 더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뒤,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고 촉구하셨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5)

예수님의 초점은 희생자들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비극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과 하나님 앞에서의 상태를 돌아보도록 하는 데 있었다.

비극을 복음 전도의 긴박함으로 받아들일 때

기독교 신앙은 죽음이 인간 존재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며,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요한복음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한다”(요 3:36)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행 1:8).

그러나 이 진리를 전할 때는 비극을 이용해 피해자들의 영원한 운명을 함부로 단정하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정죄부터 들이대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별 희생자의 마음과 마지막 순간을 알지 못하며, 최종적인 심판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 역시 무한정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과 진지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며, 회개와 믿음의 필요성을 나누는 일에는 긴박함이 있다.

그 긴박함은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돼야 한다. 위험을 알고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자연스럽듯,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생명이라고 믿는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

‘애통의 집’에서 배우는 지혜

대형 재난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순식간에 멈춰 세운다. 어제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전도서가 말하는 ‘초상집’은 단순히 슬픈 장소만은 아니다. 그곳은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번 네팔과 중국의 참사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인은 먼저 울어야 한다.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가능한 방법으로 도움을 제공하며, 고통받는 이들의 곁에 서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삶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복음을 자신만의 것으로 간직하지 말아야 한다.

비극은 우리에게 모든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남긴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일깨운다.

삶은 짧고, 사랑할 시간도, 회개할 시간도, 복음을 전할 시간도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산 자가 ‘애통의 집’에서 마음에 새겨야 할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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