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네트워크(상임대표 신철식)가 5일 오후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6.3 정읍선언 8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정읍선언은 이승만 독트린이다’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행사는 1부 기념식, 2부 학술세미나 순서로 진행됐으며 황준석 회장(북미주친선협회, 우남네트워크 공동대표)의 사회로 1부 순서가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국민의례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했으며 이어 신철식 회장이 개회사를 전했다.
신 회장은 “6·3 정읍선언이 해방 이후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 점령, 좌우 이념 대립, 정치적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국가 비전과 건국 방향을 제시한 역사적 선언이었다. 정읍선언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공산 전체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민족을 지켜내려 했던 시대적 결단이었으며,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출발점이었다”며 “이번 제8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정읍선언이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갖는 의미와 오늘날의 교훈을 되새기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 올바르게 전하기 위한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이병규 대표(이화장,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가 인사말을 전했으며 인보길 회장(뉴데일리, 이승만포럼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회장)이 기조연설을 전했다. 인 회장은 6·3 정읍선언이 해방 직후 한반도의 분할 점령과 좌우 이념 대립, 소련의 한반도 공산화 전략 속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건국 방향을 제시한 역사적 선언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인 회장은 “해방 직전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과 38선 형성, 북한 지역의 공산화 추진, 남한 내 좌익 세력의 움직임 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승만 박사가 정읍선언을 통해 미·소 강대국의 흥정에 의존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과 통일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했다.
그는 “정읍선언은 단순한 국내 정치 발언이 아니라, 한반도 문제를 국제사회 의제로 끌어올리고 유엔 결의를 통해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지게 한 전략적 전환점으로 평가됐다. 이승만의 구상은 자유세계의 지지를 바탕으로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 대한민국을 세우려는 건국 독트린으로 설명됐으며, 이후 한미동맹의 형성으로 이어진 역사적 기반으로도 조명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러시아·이란·북한 등 권위주의 진영의 결속과 안보 위협 속에서 한미동맹은 대한민국의 생명선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전시작전권 문제 역시 동맹의 본질과 연결된 사안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시민과 젊은 세대들이 관심을 가져 참여하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김인성 사무총장(우남네트워크)이 광고를 전했으며 참석자들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구호를 제창하며 1부 순서가 마무리됐다.
이어진 2부 학술세미나는 김승욱 교수(중암대학교 명예교수)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박명수 박사(우남네트워크 공동대표, 서울신대 명예교수)가 “이승만의 정읍선언, 단독정부인가? 통일정부인가?”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박 박사는 “6·3 정읍선언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이승만 박사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 정읍선언은 ‘단독정부 수립론’으로 해석되며 이승만을 분단의 책임자로 보는 근거처럼 사용돼 왔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이 사용한 표현은 ‘단독정부’가 아니라 ‘임시정부나 위원회’였고, 훗날 그는 자신이 말한 것은 단독정부가 아니라 과도정부였다고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정읍선언을 해석할 때는 후대의 비판이나 정치적 프레임보다, 이승만의 실제 발언과 당시 시대 상황을 먼저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 한반도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많은 국민은 미국과 소련의 협상만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느꼈고, 남한만이라도 정치적 기반을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추구한 것은 남한만의 영구적 단독정부가 아니었다. 그의 구상은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되, 그 과정에서 남한에 과도적 정치 체제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와 유엔을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당시 미군정은 소련과의 협상을 재개하기 위해 좌우합작과 과도입법의원 구성을 추진했다. 이승만도 일정 기간 이를 수용하며 협력했지만, 친소 공산주의 세력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민족주의적 좌파와의 협력 가능성은 열어두었지만, 한반도를 소련식 공산 체제로 끌고 가려는 세력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후 과도입법의원 구성과 미군정의 정국 운영을 둘러싸고 갈등이 깊어지면서, 이승만은 한반도 문제를 미국과 유엔 등 국제무대에 제기하는 외교 노선으로 나아가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읍선언은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겠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미소공동위원회 실패 이후 한반도 문제를 국제사회로 가져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통일국가 건설을 추진하려는 전략적 선언으로 볼 수 있다. 1948년 세워진 대한민국 역시 단순한 ‘단독정부’가 아니라, 남북 전체를 대표할 권한을 지향한 ‘중앙정부’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읍선언은 분단을 고착화한 선언이 아니라, 공산화 위협과 국제정치의 혼란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과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가려 했던 역사적 선택이었다”고 했다.
이어 이은선 박사(안양대 명예교수)가 “이승만의 남선순행과 정읍선언의 의미”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이 박사는 “정읍선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 선언이 나오기 전 이승만 박사가 남선 순행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어떤 흐름을 만들어 갔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당시 지방 곳곳은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이 강했고, 정치적 충돌의 위험도 컸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대규모 군중 앞에서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민주공화국 건설, 국민적 단합, 독립국가 수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많은 국민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분명히 알지 못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함께 갈 수 없으며 종교의 자유와 기본권이 보장되는 민주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당시 미소공동위원회와 신탁통치 문제도 중요한 배경이었다. 반탁 세력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느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고, 우파 세력은 우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회의에 참여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러나 소련은 반탁 단체의 참여를 문제 삼아 회의를 무산시켰고, 이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 실패의 책임이 소련에 있다는 인식이 커졌다.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 전취 대회가 열리며 자주 정부 수립과 반소·반공 여론이 확산됐고, 남한에도 국민의 의사를 대표할 정치적 기구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힘을 얻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흐름 속에서 나온 정읍선언은 우발적인 발언이 아니라, 남선 순행과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독립 전취 대회 이후의 정세를 고려한 정치적 발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나 ‘위원회’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당시 단독정부라는 말은 통일을 포기한다는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는 그 표현을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의 구상은 남한만의 영구적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임시인민위원회에 대응해 남한 주민의 뜻을 대표할 조직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 통일국가 건설로 나아가려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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