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방산시장에서 대형 수주를 이어온 K방산이 유럽의 지역 우선주의와 현지화 요구라는 장벽에 직면했다. 캐나다 차세대 잠수함 사업에 이어 스페인 K9 자주포 공급 사업에서도 현지 산업 보호와 기술 주권 논리가 변수로 떠올랐다.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을 중심으로 방산 공급망 현지화와 역내 기업 참여 요구가 강화되면서 가격과 성능, 납기 경쟁력만으로는 수주를 장담하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 3월 스페인 최대 방산기업 인드라와 45억5400만유로, 약 7조7000억원 규모의 궤도형 자주포 공급 사업에 관한 구속력 있는 계약을 체결했다.
사업은 K9 자주포를 기반으로 스페인 육군에 자주포 128대와 탄약운반차 120대 등을 공급하는 내용이다.
인드라 경영진 교체 후 현지 업체 참여 검토
그러나 최근 인드라 경영진이 교체되면서 사업 추진 구도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신임 경영진은 자주포 사업권을 놓고 장기간 법적 분쟁을 벌여온 스페인 방산업체 산타바르바라를 사업 파트너로 참여시키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페인 정부는 인드라 지분 28%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방산 분야의 전략적 자율성과 자국 산업 생태계를 강화하기 위해 인드라와 산타바르바라의 협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 기업의 참여가 현실화하면 기존 계약의 구조와 K9 자주포 기술 공유 범위를 둘러싼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핵심 기술 보호와 계약 유지 사이 고민
쟁점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핵심 기술과 지식재산권 보호다.
기존 계약에는 신규 파트너가 참여할 경우 한화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인드라가 산타바르바라를 사업에 참여시키려면 K9 자주포의 설계와 기술 정보를 일정 부분 공유해야 한다. 한화로서는 경쟁 관계에 놓일 수 있는 현지 기업에 기술이 넘어갈 가능성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스페인 경제매체 엑스판시온은 한화가 경쟁사와의 기술 공유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이 경우 인드라가 위약금을 부담하고 계약을 해지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화가 신규 파트너 참여에 동의하지 않으면 핵심 기술은 지킬 수 있지만 대형 수주를 잃을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계약 유지를 위해 기술 공유 범위를 넓힐 경우 향후 유럽 시장에서의 경쟁력과 지식재산권 보호가 부담으로 남을 수 있다.
유럽 방산시장, 역내 생산·기술 이전 강화
스페인 K9 자주포 사업을 둘러싼 논란은 유럽 방산시장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국가들은 국방비를 확대하며 재무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동시에 무기 도입 과정에서는 역내 생산과 기술 이전, 현지 방산기업 참여를 우선하는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캐나다 차세대 잠수함 사업에서도 나타났다. 한화오션은 가격과 납기 경쟁력을 내세웠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인 독일의 TKMS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업계에서는 K방산이 유럽과 나토 회원국 시장에서 수주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제품 공급을 넘어 현지 기업과의 협력 방식, 기술 보호, 생산체계 구축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업계 관계자는 “유럽 시장은 가성비와 납기 준수만으로 뚫기 어려운 블록화 장벽을 강화하고 있다”며 “현지 이해관계를 조율할 새로운 수출 모델과 다각적인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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