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 이후 유지해 온 무기 수출 제한 정책을 사실상 대폭 완화하면서 전후 ‘평화국가’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조치로 일본은 기존에 제한됐던 살상 능력을 갖춘 무기까지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21일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날 각의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통해 ‘방위장비 이전 3원칙’과 관련 운용지침을 개정하고 이른바 ‘5유형’ 규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개정으로 그동안 구조·수송·경계·감시·소해 등 비살상 목적에 한정됐던 방위 장비 수출 범위가 확대됐다.
살상무기 수출 허용… 방위장비 수출 범위 확대
이번 조치로 일본은 자위대법상 ‘무기’로 분류되는 장비까지 수출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일본은 호위함이나 전투기와 같은 완성 무기의 경우 다른 국가와 공동 개발·생산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수출을 허용해 왔다. 그러나 이번 개정으로 완성 무기 수출 제한이 크게 완화됐다.
일본 정부는 무력 충돌 당사국에 대한 수출은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일본의 안보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특별한 경우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 결정 등을 통해 수출을 허용할 수 있도록 했다.
새로운 심사 기준에는 수출 대상국의 안보 환경과 수출 통제 체계, 일본의 방위력 정비와 자위대 운용에 미치는 영향 등이 포함됐다. 또한 수출 이후 무기 관리 상황을 점검하는 사후 모니터링 체계도 강화하기로 했다.
살상 능력을 가진 무기 수출 대상은 일본과 방위장비·기술 이전 협정을 체결한 국가로 제한된다. 현재 미국, 영국, 호주, 인도, 필리핀, 프랑스 등 17개국이 이에 해당하며 향후 협정 체결이 확대될 경우 대상 국가는 20개국 수준까지 늘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경계관제레이더 등 살상 능력이 없는 장비는 별도 제한 없이 수출할 수 있게 됐다.
인도·태평양 안보 협력 명분… 장기적 군사 협력 강화
일본 정부는 이번 규제 완화의 배경으로 우방국과의 안보 협력 강화를 제시했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포함한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군사 활동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미국 및 동맹국들과 협력 체계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이 반영됐다는 설명이다.
무기 수출을 통해 정비와 기술 협력 등을 포함한 장기적인 방위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이를 통해 안보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방위 산업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가 무기 수출을 결정할 경우 국회에 관련 내용을 문서로 보고하도록 하는 절차를 마련했다. 다만 이러한 장치가 실제로 실질적인 견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충분한 논의 부족 지적… 평화국가 원칙 변화 논쟁
이번 규정 개정 과정이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방위장비 이전 3원칙과 운용지침은 법률이 아닌 행정 규정이기 때문에 국회 심의 없이 개정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 정책 변화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2023년부터 2024년까지 약 11개월 동안 진행된 무기 수출 정책 협의는 총 27차례 이루어졌지만, 이번 개정 과정에서는 약 4개월 동안 세 차례 협의만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전후 일본의 무기 수출 정책 방향이 충분한 논의 없이 변화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오사카세이케이대 사도 아키히로 교수는 일본이 전후 유지해 온 평화국가 정체성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정책 변화가 추진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일본이 무기를 판매해 전쟁을 조장하지 않는 국가라는 기존 원칙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방위장비 이전 3원칙은 자국 방위 장비를 해외로 이전하거나 수출할 때 허용 범위와 심사 기준을 규정하는 핵심 정책이다. 그동안 운용지침을 통해 살상 능력을 가진 무기의 수출을 엄격히 제한해 왔으나 이번 개정으로 정책 방향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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