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제리 맥글로틀린의 기고글인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될 수 있는가?’(Can a faithful Christian be damned for not being baptized?)을 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제리 맥글로틀린은 헌정 공화국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헌신하는 게스트를 대변하고 유대-기독교 윤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한 홍보 기관인 스페셜 게스트(Special Guest)의 CEO로 재직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는 최근 치유와 회개, 그리고 하나님과의 더 깊은 동행을 갈망하는 신자들이 모이는 한 유명한 기도 수련회를 다녀왔다. 그곳에서 회개와 순종에 대한 열정이 유난히도 분명한 한 신자를 만났다. 이후 필자의 집에서 이어진 교제의 자리에서, 그의 그 열정은 필자의 신앙적 확신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차분한 신학적 토론이 아니었다. 목소리가 높아진 언쟁이었고, 결국 그의 아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고통스러운 말다툼으로 번졌다. 보기에도 좋지 않았고, 필자는 그 상황이 그 지경까지 이르도록 내버려둔 것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
갈등의 중심에는 ‘세례’가 있었다. 정확히 말해, 한 번도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과연 참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그 경험은 필자로 하여금 단순히 교리를 재검토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훨씬 더 무거운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순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은혜를 가리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제가 파괴될 때 우리는 무엇을 마주하게 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복음주의 전통 전반에 걸쳐 기독교인들이 공통으로 동의하는 사실이 있다. 세례는 중요하다. 예수님은 세례를 명령하셨고, 사도들은 이를 실천했으며, 교회는 오랜 세월 세례를 믿음의 공개적 고백이자 그리스도와의 동일시로 소중히 여겨왔다.
세례는 선택적인 순종이 아니다. 그것은 가르쳐야 할 거룩한 행위이며, 권면되어야 하고 기쁨으로 기념되어야 할 신앙의 표지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세례가 무엇인지뿐 아니라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서도 분명히 하라고 요구한다.
신약성경은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며 믿음으로 받는 것임을 명확하게 선언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 이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에베소서 2:8–9).
세례는 구원 이후에 따르는 순종의 행위이지, 구원을 만들어내는 장치가 아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실천이, 신자들에 의해 정죄의 경계선으로 변질될 때 발생한다. 특히 그 경계가, 이미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실지도 모를 다른 이들의 영원한 운명을 단정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 더욱 그렇다.
십자가 위의 강도는 그러한 확신에 대해 영원한 반증으로 서 있다. 세례도, 의식도, 종교적 행위도 행할 기회가 없었던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분명한 약속을 받았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예수님은 거룩함의 기준을 낮추신 것이 아니다. 구원의 근원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이 문제는 세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은사주의 및 오순절 전통에서는 방언과 예언을 포함한 성령의 은사의 중요성이 자주 강조된다. 성경은 이러한 은사들을 인정하며, 사도 바울 역시 그것들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을 말하지 못하거나 예언을 경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곧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왜 그런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성령의 나타남이 곧 칭의의 기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언은 중요하다. 예언도 중요하다. 세례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구원의 기초가 아니다. 구원의 기초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필자의 거실에서 벌어진 그 논쟁은 어느 한쪽이 진리를 미워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진리가 충분한 겸손과 인내, 사랑 없이 옹호되었다는 데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순간 필자는 친구를 향한 사랑을 거의 느끼지 못했고, 그 감정은 말투에 그대로 드러났다.
사도 바울은 사랑에서 분리된 올바른 신학조차 아무 유익이 없다고 경고한다. 원수는 거짓 교리가 없어도 된다. 참된 교리가 거칠게 휘둘러질 때, 그것으로 성도들을 갈라놓고 증언을 훼손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마귀는 기독교인들이 본질적인 신앙 실천을 ‘자격 시험’으로 바꾸거나, 순종을 둘러싼 논쟁이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연합을 가릴 때 기뻐한다.
우리는 세례를 포함한 순종으로 신자들을 부를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 중요성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열매를 맺으며, 신실하게 살아가지만 실천이나 이해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이유로 그들을 정죄하라고 우리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다.
바울은 놀라운 구분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17). 이는 세례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구원이 복음 그 자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은혜는 순종과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순종을 낳는다. 그러나 순종이 은혜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순간, 복음은 조용히 변질된다. 확신은 두려움으로 바뀌고, 교제는 의심으로 대체되며, 형제는 형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필자는 그날 밤, 더 일찍 멈췄어야 했다. 확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평화를 선택했어야 했다. 그 깨달음 역시 제자도의 일부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확신의 감소가 아니다. 확신을 붙드는 방식에 있어 더 많은 겸손이다. 세례는 선물이다. 방언도 선물이다. 예언도 선물이다. 구원은 순전한 은혜다. 그것은 거저 주어지고, 단호하게 지켜지며, 인간의 어떤 덧붙임으로도 개선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함께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상처 입히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는 원수에게 만족을 허락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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