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렐라이(Die Lore-Ley)
내 마음이 이토록 슬픈 까닭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네.
옛날부터 전해오는 동화 하나가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네.
공기는 서늘하고 날은 저무는데
라인강은 고요히 흐르고,
산봉우리는 저녁 햇살 속에
아름답게 반짝이네.
저 위 높은 곳에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처녀가 앉아 있네.
황금빛 장신구는 번쩍이고
그녀는 황금빛 머릿결을 빗고 있네.
황금 빗으로 머리를 빗으며
그녀는 노래를 부르네.
그 노래는 기이하고도
강렬한 선율을 가졌네.
작은 배를 탄 뱃사람은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혀,
강가의 암초는 보지도 못한 채
저 높은 곳만 넋을 잃고 바라보네.
결국 물결이 배와 뱃사람을
삼켜버릴 것이라 나는 믿네.
로렐라이가 부르는 그 노랫소리가
그렇게 만들었으리.
'로렐라이'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1797-1856)는 유대계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 기자, 문학 평론가로 괴테, 실러와 더불어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이었다. 신랄한 풍자와 비판의식, 허무주의적 경향이 강한 시와 사설을 남겼으며, 독일 정부의 미움을 받아 프랑스로 추방되기도 하였다.
하이네는 1797년 뒤셀도르프의 가난한 유대계 상인 집안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뒤셀도르프는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인해 당시 프랑스령으로 편입된 지역이었다. 어릴때 잠깐 유대교 학교를 다닌 것을 제외하면 하이네는 가톨릭 재단이 세운 김나지움을 거쳐, 궁극적으로 프로이센 당국의 유대인 차별을 피하기 위해 1825년 루터교로 개종한다. 하지만 하이네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는 지는 불분명하다
일찍이 문학적 소질을 보였고, 상인이 되려고 프랑크푸르트에 갔으나 실패, 은행가 숙부의 재정적 도움으로 1819년 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했다가 문학으로 바꾸었다. 그의 첫 출판은 1822년에 발표된《시집(Gedichte)》이었으며 1823년에 희곡 《윌리엄 래트클립(en)》과 희곡《알만조르(de》를, 1824년에 시집 《33편의 시(Dreiunddreißig Gedichte)》을 발간했다. 1826년에 출판된 《여행그림들(Reisebilder) 제1부》에는 재기 넘치는 《하르츠 기행(紀行)(de)》등, 1827년의 《여행그림들(Reisebilder) 제2부》에는 《북해》등, 1830년의 《여행그림들(Reisebilder) 제3부》에는 《제노바 (Genua)》등을 수록했다. 그가 문학적 명성을 얻은 것은 1827년 첫번째 대형 시집 《노래들의 책(de)》을 내었을 때였다.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에 감동되어 1831년 봄 파리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독일·프랑스의 신문·잡지에 많은 논문과 평론을 내어 언론인으로서는 인정을 받았으나, 독일 정부의 미움을 산 후 국외 추방 결의로 인해 계속 파리에 머물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논문과 아름다운 시를 썼다.
1835년에 독일연방의회의 결정에 의하여 '청년 독일파(de)' 저서들의 발행이 금지되면서, 하이네도 활동과 경제적으로 타격받았다. 소설 《피렌체 夜話(Florentinische Nächte)》를 1837년 펴냈고 1841년에는 오랜 애인이었던 마틸데(Mathilde)와 결혼했다. 1841년 집필, 1843년 신문발표, 1847년에 단행본 발간한《아타 트롤(de)》은 격조 높은 풍자적 운문서사시로 바이런과 함께 문학사에서 특이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가 독일 정부로부터 탄압받고 국외로 추방 결의된 직접적인 이유가 된 작품은 비판적인 풍자 운문서사시 《독일. 하나의 겨울 동화(de)》(1844)였다. 또, 1844년에는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칼 마르크스 및 그의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과 교류했지만 매사 회의적이어서 사회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다 알려져 있다.
말년에 그는프랑스에 계속 머물면서 작품 및 언론 활동을 지속했는데, 1851년에 3번째 또는 4번째 겸 최종 시집이자 이야기체 시집인 걸작《로만체로(de)》등을, 1854년엔 평론집《루테치아(Lutetia)》등을 발간했다. 1830년대 이후 질병으로 고통 받던 하이네는 부분적으로 실명했고, 1856년 사망하여 몽마르트르 묘지에 안장되었다.
라인강의 낭만주의(Rheinromantik)
독일을 여행하는 한일 여행객들의 로망(?) 라인강의 로렐라이 언덕은 이미 로마 시대부터 사람들이 오가며 기록을 남겼던 곳이다. 14세기와 15세기의 르네상스 시기에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와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훗날의 교황 비오 2세) 같은 지식인 여행가들이 라인강을 찾았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 예술가들이 뒤를 이었으며, 18세기 말에 이르러 이 강은 게오르그 포르스터와 알렉산더 폰 훔볼트 같은 학자들에게 필수적인 여행 코스가 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 이탈리아로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떠나던 여행객들에게 라인강은 중요한 경유지였다. 이미 괴테, 프리드리히 횔덜린, 그리고 클라이스트의 라인강 묘사에서는 새로운 풍경 체험의 전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파두아 대학의 교수였던 이탈리아인 아우렐리오 데 조르조 베르톨라는 자신의 라인강 체험을 기록했으며, 이는 1796년 <슈파이어에서 뒤셀도르프까지의 회화적인 라인강 여행(Malerische Rhein-Reise)>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본래 독일의 낭만주의 선구자는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 목사였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 독일의 루소라 불린 감정과 감성, 민족역사를 강조한 질풍노도(疾風怒濤, Strum und Drang)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요 신학자·철학자·작가요 문예비평가였다.
헤르더는 동프로이센의 소도시 모른겐(지금의 폴란드)에서 초급 교원의 아들로 태어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의학과 신학을 배운 뒤 철학자 칸트(1724-1804)의 강의를 듣는다. 목사였으나 그는 항상 성직자뿐 아니라 당대 철학사상가요 작가로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질풍노도(疾風怒濤)는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문화 운동이다. 1765년 경부터 1785년 경까지의 약 20년 동안이 이에 해당된다. 계몽주의에서 고전주의·낭만주의 시대에 걸쳐 과도기적 역할을 한 문학·연극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질풍노도(疾風怒濤) 운동의 호칭은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 폰 클링거의 동명(同名) 희곡에서 딴 것으로, 거친 청년의 열광과 파괴 그리고 그 파탄을 배경으로 한다. 단명하였으나 후대 문학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남긴 것도 이 운동의 본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상적으로 이 운동은 장자크 루소의 자연사상이나 슈페너(Spener)의 독일 경건주의, 희곡적으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았다. 헤르더가 독일의 루소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라인강의 낭만주의'는 1802년, 파리로 여행을 떠나던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라인강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론적 저술에서 처음으로 주제로 다루면서 시작된다.
"자연의 유적 위에 새겨진 인간의 용기 있는 흔적만큼 (풍경의) 인상을 아름답게 하고 강화하는 것은 없다. 거친 암벽 위의 용맹한 성채들, 인간 영웅 시대의 기념비들은 자연의 영웅 시대가 남긴 더 높은 유적들과 연결된다. 영감의 샘이 우리 눈앞에 눈에 띄게 쏟아져 나오는 듯하며, 조국의 오래된 강은 마치 자연을 선포하는 시 문학의 거대한 줄기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1823년에 발표된 하이네(Heine)의 그 유명한 시는 바로 이러한 전통의 맥락 위에 놓여 있다. 그녀를 바위 위에 앉아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미녀로 설정한 것은 문학과 관광 산업이 만들어낸 공로였다.
그녀가 사이렌(새와 여자가 결합한 복합적 존재로, 그 노랫소리가 죽음을 부름)으로 진화하는 흐름은 이제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일찍이 오디세우스가 그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돛대에 묶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로써 하이네는 브렌타노가 창조했던 비극적인 여성상을 남성의 비극이 되는 '팜므 파탈'로 완전히 변모시켰다. 그가 1823년에 쓴 로렐라이 시는 1824년 베를린의 잡지 《게젤샤프터(Der Gesellschafter)》에 여러 편의 시 중 첫머리에 실리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로렐라이 바위와 새로운 신화의 탄생
오늘날 로렐라이 바위(Loreleyfels)는 라인 낭만주의의 상징으로 통한다. 하지만 이 바위는 이미 중세 시대부터 '몬스 루를라베르히(Mons Lurlaberch)', '루를렌베르게(Lurulenberge)' 등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바위의 신화 세계는 원래 난쟁이와 거친 사내들의 땅이었다. 16세기부터는 바위의 독특한 메아리 현상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아내 조제핀 황후도 이 메아리를 즐겼고, 쾰른의 증기선들은 이 바위 앞에 멈추어 서곤 했다. 당시에는 동굴 거주자로 고용된 사람이 예포를 쏘아 세 번 울려 퍼지는 메아리를 확인시켜 주었는데, 빅토르 위고에 따르면 그는 나폴레옹 군대 출신의 프랑스 기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철도가 건설되면서 메아리는 파괴되었고, 그 노병도 일자리를 잃었다.
사실 중세 시대부터 로렐라이 바위는 니벨룽의 보물과도 연관되어 언급되었다. 하겐 폰 트로니에(Hagen von Tronje)가 그곳 라인강에 보물을 수장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바위가 잊힌 독일의 과거를 상징하는 지표가 되고, 라인의 처녀들(Woglinde, Wellgunde, Floßhilde)이 니벨룽의 보물을 지키는 수호자로 등장하게 된 것은 1854년 리하르트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에 이르러서 였다.
1870/71년(독일 통일기)에 이르면 라인강은 명실상부한 '독일의 강'으로 자리매김한다. 이제 로레 라이의 금발 머리는 북유럽의 발퀴레와 더불어 그녀를 게르마니아(Germania, 독일의 의인화)로 정의하는 요소가 된다. 1883년 뤼데스하임 위의 니더발트 언덕에 게르마니아 동상이 건립되었는데, 사실 초기에는 건립 장소로 로렐라이 바위도 검토되었으나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871년 이후에는 로렐라이 동상을 세우자는 주창자들도 나타났다. 제국 건국 이후 프로이센 특유의 강인한 무사 정신을 대변하게 된 게르마니아의 '예술적인 자매'로서, 라인의 요정이 "독일적 예술 정신, 독일의 노래, 그리고 독일 시 문학의 이상"을 구현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라인강이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한 것은 나폴레옹의 세계 제국주의 정책이 불러온 경제적 궁핍과 보편적인 불만 때문이었다. 특히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빌헬름 폰 훔볼트, 카를 프라이헤르 폼 슈타인,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와 같은 프로이센의 인물들은 나폴레옹에 맞선 해방 전쟁을 촉구하며 라인강에 주목했습니다. 아른트는 1813년 《라인강, 독일의 강이지 독일의 국경이 아니다(Der Rhein, Teutschlands Strom, aber nicht Teutschland Gränze)》라는 제목의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1814년 새해 전야, 블뤼허 장군이 카우프(Kaub)에서 라인강을 도하하자 《라인 메르쿠르(Rheinischer Merkur)》의 발행인인 요제프 괴레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라인강은 독일의 힘차게 뛰는 동맥이다. 서쪽의 위협받는 국경에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는 조국의 견고한 방벽이자 보호막이 되어야 한다…" 그 결과 라인강 지역을 아우르는 애국적인 시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하이네의 '로렐라이'는 이 같은 독일의 민족적, 애국적 배경에서 나와 명성을 얻은 詩였던 셈이다.
"Martin Luther gab uns nicht bloß die Freiheit der Bewegung, sondern auch das Mittel der Bewegung; dem Geist gab er nämlich einen Leib. Er gab dem Gedanken auch das Wort. Er schuf die deutsche Sprache."
— Heinrich Heine
"마틴 루터는 우리에게 단순히 움직임의 자유만을 준 것이 아니라, 움직임의 수단 또한 주었다. 그는 정신에 몸을 입혀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에 '말(Word)'을 부여했다. 그는 독일어를 창조했다."
— 하인리히 하이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신학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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