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코리 블록의 기고글인 ‘하나님은 왜 자신의 아들을 죽이셔야 했는가?’(Did God need to kill His own Son?)를 최근 게재했다.
코리 브록 박사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성 콜룸바 자유교회의 목회자이며, 에든버러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설교학을 가르치는 강사이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죽이셔야 했는가?”라는 질문에서 ‘필요했다(need)’, ‘죽였다(kill)’ 같은 단어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한다. 일상 언어에서 ‘죽인다’는 표현은 분노나 복수, 혹은 비이성적 감정에서 비롯된 임의적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신학적 언어는 이런 일상적 뉘앙스와 구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십자가 사건에서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행동하신 것처럼 오해하게 되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감정적 언어가 신중한 사고 자체를 시작도 못 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의도일 때가 많다. 형벌 대속(대속적 속죄)을 비판하는 이들은 자극적인 표현을 선호한다. 예컨대 “우주적 아동 학대(cosmic child abuse)”라는 표현은 진리를 설명하기보다 혐오감을 일으키기 위해 고안된 말이다. 우리는 이런 감정적 프레임에 휘둘리지 말고, 성경이 요구하는 만큼 정확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제 속도를 늦추고 몇 가지를 구분해 보자. 십자가는 필요한 사건이었는가? 무엇을 위해 필요한가?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실 자유가 있는가? 주지 않으실 자유도 있는가? 하나님께 ‘필요’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과연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셨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가?
마치 보석을 여러 각도에서 살피듯, 이 질문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자.
하나님께 ‘필요’가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어떤 필요도 없다. 이는 하나님이 외부의 어떤 힘에도 제약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 밖에 존재하는 어떤 도덕 법칙이 하나님을 얽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영원하시고 변함없으시며, 감정의 변화에 휘둘리지 않으시고, 어떤 부분으로 나뉘지 않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존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창조하실 자유도 있고 창조하지 않으실 자유도 있으며, 아들을 주실 자유도, 주지 않으실 자유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죄인들이 요구했기 때문도 아니고, 어떤 우주적 법칙이 강제했기 때문도 아니다. 십자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온 선물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죄인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 구원하실 수 없었는가? 여기서 논의가 깊어진다. 십자가를 통한 은혜는 외부의 강제적인 요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구원하지 않으실 자유도 있으시지만,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다면 자신의 거룩하고 의로운 본성에 따라 행동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대속적 정의 없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었을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진정한 자유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따라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을 온전히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시다. 그러므로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신다. 하나님은 공의를 이루시며 사랑을 베푸신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아들을 대신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공의를 이루면서 죄인들에게 사랑을 부어주셨다. 만약 공의를 해결하지 않고 단순히 용서만 하셨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자의적인 행동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과 모순되는 일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셔야 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외부의 강제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기에, 자신의 거룩한 본성에 따라 그렇게 하셔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유일한 ‘필요’는 자신의 의로운 성품에 일관되게 행동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면서도 공의를 유지하기 위해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셔야 했다.
요약하면, 하나님이 자유로운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불의한 자를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죄 없는 희생을 통한 대속적 죽음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셨는가’
여기서 감정적 반응이 최고조에 이른다. “우주적 아동 학대”라는 표현은 성부 하나님이 수동적인 성자를 일방적으로 죽이는 존재로 강조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다.
성경은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죽였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두 가지 진리를 동시에 말한다. 첫째, 그리스도는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셨다. 둘째,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위해 독생자를 주셨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로마서 8:32)라고 고백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로마 권력이 그를 죽였다. 대제사장이 그를 넘겼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군중도 책임이 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너희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사도행전 2:36)고 말한다. 더 나아가 복음을 믿는 모든 죄인은 결국 우리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신가?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진노를 아들에게 쏟으셨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셨고, 그분 위에 공의의 심판을 온전히 행하셨다. 동시에 성자는 기쁨을 바라보며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감당하셨다(히브리서 12:2).
성경은 “우리는 그를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이사야 53:4-5)라고 말한다.
또 다른 구절을 보면 “그를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로마서 3:25),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다”(사도행전 2:23)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예수를 심판하셨다는 사실이나, 성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다.
왜 십자가 사건은 ‘우주적 아동 학대’가 아닌가?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예수의 죽음은 자발적이었다. 성자는 사랑으로 이 길을 선택하셨다. 둘째, 십자가는 삼위 하나님의 한 뜻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셋째, 부활은 예수의 의로움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기에 예수는 반드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셔야 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의 의지에 반하여 그를 죽이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진노를 아들에게 부으셨고, 아들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러므로 이것은 ‘학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다. 놀라운 사랑이다.
결국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를 자신의 희생으로 만족시키신 사건이다. 복수심이 아니라 사랑이 이 모든 계획의 동기였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셨고, 진노를 쏟으셨으며, 그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공의와 사랑을 우리를 위해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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