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한나 밀러 킹 작가의 기고글인 '구원은 무엇인가?'(What is salvation anyway?)를 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한나 밀러 킹(Hannah Miller King)은 북미 성공회(Anglican Church in North America) 소속 사제이자 작가다. 그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서부에 있는 더 바인 성공회 교회(The Vine Anglican Church)에서 부목사(associate rector)로 섬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많은 기독교 신학의 기저에는 공통된 메시지가 깔려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게 된다는 생각이다. 순결 문화(purity culture)는 성적으로 순결하게 살면 하나님이 좋은 배우자와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주신다고 암시하고, 번영신학은 거룩한 삶이 결국 건강과 부로 이어질 것이라고 약속한다. 또 많은 기독교 부모 교육 프로그램은 올바른 원칙에 따라 자녀를 양육하면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고 좋은 선택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공식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선한 의도에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격언들이 신앙의 동기를 형성하기 시작할 때, 순종은 점차 원하는 결과와 연결되면서 그 의미가 약화된다. 결국 하나님을 마치 축복을 얻기 위해 동전을 넣는 자동판매기처럼 여기게 된다. 필요한 종교적 행동을 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사고가 자리 잡는 것이다. 그렇게 신앙생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영적 거래로 축소되기 쉽다.
필자는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면서 이러한 ‘거래적 신앙 구조’가 생각보다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복음에 대한 이해 속에도 일종의 교환 논리가 스며 있었다. 예수께 마음을 드리면 그 대가로 천국행 티켓을 받는다는 식의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필자가 속했던 복음주의 문화에는 ‘지옥을 면하게 해주는 신앙’이 강하게 강조되어 있었고, 그 메시지는 어린 필자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다.
오늘날 필자는 그 메시지 안에 분명한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필자는 자신의 자녀들도 그 사실을 믿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녀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천국을 얻기 위해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천국을 사모하는 믿음을 갖기를 바란다.
필자의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가족과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이 치유를 베푸실 것이라 믿었다. 병원 치료를 받는 동시에 가족은 교회에 성실히 출석했고 간절히 기도했다. 목회자들은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어 기도했고, 교회 친구들도 아버지가 살아날 수 있도록 각자의 방식으로 돕고 응원했다.
처음 2년 동안은 암과 싸우는 일에 대한 희망과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은 점차 지쳐 갔다. 치유에 대한 기대는 죽음을 준비하는 현실로 바뀌었고, 낙관은 슬픔과 조용한 작별 인사로 변해 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린 시절의 필자는 큰 혼란을 느꼈다. 하나님께 화가 나기도 했다. 가족은 믿음으로 기도했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모든 일이 잘 해결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다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결과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열네 살이었던 필자는 하나님이 마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필자는 가족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믿음은 오히려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위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찾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지만, 아버지는 기도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치유에 대한 희망이 줄어드는 동안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오히려 깊어졌다.
병이 깊어지던 어느 날, 아버지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도문을 남겼다: “주님, 저는 치유보다도,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과의 친밀함을 원합니다. 주님,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주님이 제게 무엇을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찾으실 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곧 치유를 받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결국 하나님 자신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묘비에 욥기 1장 21절을 새기도록 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목회자로 사역하면서 필자는 수많은 갈망과 상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는 젊은 부부, 결혼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남편, 독신의 외로움과 씨름하는 친구, 성인이 된 아들의 중독 때문에 고통받는 어머니의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단순한 격언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 안에 담긴 소망을 비영적이거나 이기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진심으로 구하라고 초대하신다. 우리의 욕망이나 하나님에 대한 실망을 억누른다고 해서 더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덜 솔직해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갈망 속에서 신앙이 요구하는 중요한 과제는 선물과 선물을 주시는 분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기독교 이야기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복음은 단순히 구원에 대한 추상적 메시지도, 축복의 분배도, 심지어 용서의 약속만도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우리의 죄 사함은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을 경험하도록 하는 길이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어떤 것을 얻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를 향해 있다.
이 진리는 교회가 성찬을 나눌 때 다시 확인된다. 성도들은 희망을 품고 혹은 상처를 안고 성찬상 앞에 나온다.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질문들을 마음에 품은 채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신다.
필자는 성찬을 나눌 때 교인들의 눈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많은 약속을 해 주고 싶다. 그들의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고, 병이 치유될 것이라고, 가족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러나 그런 약속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더 큰 것을 전할 수는 있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필자가 존경하던 한 목회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회심의 과정”이라고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구원의 확신을 반복해서 얻는 문제가 아니라, 구원을 더 깊이 경험해 가는 과정이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믿음뿐 아니라 우리의 사랑의 방향까지 변화시키신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하나님을 모든 것 위에 두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 과정은 평생 계속된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실 것 때문에 하나님께 끌릴 수 있다. 천국에 대한 소망, 삶의 도덕적 기준, 교회 공동체가 주는 소속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깨닫게 된다. 우리의 궁극적인 갈망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신학자 알렉산더 슈메만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배고픈 존재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배고픈 것은 하나님이다. 우리의 모든 배고픔 뒤에는 하나님이 있다. 모든 갈망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다.”
예수와의 교제 속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맛보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과의 연합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며 우리의 갈망도 온전히 채워질 것이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의 믿음은 때로 아픔이면서 동시에 충만함이다. 우리는 우리가 찾던 분을 이미 만났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래서 교회는 여전히 이렇게 기도한다: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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