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거주춤
내 눈이 가장 멀리에서 나를 보았을 때는
내 귀가 가장 가까이에서 당신을 들었을 때이다
그걸 바탕으로 우리가 만나
산다고 하는 이렇게 고유한 밤에
잎을 떨고 있는 목요일의 파초 앞에
당신이라고 부르면 엉거주춤하는 데서 당신은 간직된다
당신 방으로 가려다 내 방으로 건너가는 아쉬움에서
나를 보고도 마주치지 않는 척하는 눈물의 유래에서
당신을 안고서도 사이가 뜨는 배 밑에서
죽어서도 나는 엉거주춤
그곳이 아무리 멀어도 당신에게 가 누웠다
내게 와 누웠다
할 것 같은데
아직 귓속으로 수줍게 떨어지는
부러지는 시간의 참나무 숲에서 나는,
<※2010 올해의 좋은 시 100選 중에서>
황학주(1954~) 시인은 빛고을 광주 계림동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서석초 졸, 광주상고를 다니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하였다.
CCC(한국대학생 선교회, 대표 김준곤 목사) 출신으로 편집인을 지냈다. 김준곤 목사께서 국문학 출신의 탁월한 문장가였기 때문이었을까? 당시 CCC에는 모세와 드보라, 다윗과 솔로몬처럼 문예적 소양을 가진 열정의 문학도들이 많았다. 박영률 목사(당시 CCC 총무)와 김성영 목사(전 성결대 총장)는 시인이었으며, 안효선 간사(현 로마한인교회)와 송기태 목사(전 <목회와 신학> 편집장, 현 호주 목회와 언론인), 전광규 목사(전 <목회와 신학> 편집장) 등은 문장과 편집과 신학서 번역 등으로 그 이름을 알렸다. 같은 CCC출신으로 이롬 생식과 두유로 유명한 '통합의학자'이자 '암 치유 전문의', 황성주 박사(꿈이 있는 교회 담임 목사)가 그의 동생으로 알고 있다.
황학주 시인은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도종환 시인이 <고두미 마을에서>(1984)를 上梓하며 문단에 나온 사례와 유사하다. 당시 떠오르는 시인이요 평론가였던 출판사 청하의 장석주 시인이 황 시인을 극찬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장석주는 시집 ‘사람’의 해설에 ‘상처 입은 넋들을 위한 추도사’라는 제목을 달고 “여기 놀랄 만한 새로운 시인이 있다!” 며 운을 뗐다. 그리고 ”황학주의 시를 읽는 즐거움은 1차적으로 그의 시적 표현, 비약과 단절의 수사학이 두드러지는 묘미를 음미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나, 그러나 진짜 그 시세계의 독작적인 의미와 가치는 황학주에 의해 체계화된 우리 삶의 진실한 모습일 것이다. 황학주의 ‘사람’은 우리 시대의 상처받은 삶의 기록이다. 그만큼 그의 시집은 비극적인 정서로 충만되어 있다. 상처, 그 손상당한 삶을 고요히 껴안고 눈물어린 눈으로 우리 삶의 보편의 지평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시들을 읽는 것은 우리가 우리 시대의 삶의 훼손, 그 고통을 동의하는 그만큼 대단히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일찍이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에 의해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냈던 한국근대 역사체험으로서의 우리 시대의 삶의 상처, 삶의 고통이 다시 황학주의 ‘사람’에 와서 더 깊고 진지한 표현으로 활짝 꽃피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게 감동적”이라고 평했다.
그만큼 황 시인의 시는 독특한 어법과 돌발적 이미지를 구사하며 한국 서정시에 다채로움을 더하며 첫 시집 ‘사람’ 이후에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 등 11권의 시집을 더 펴냈다. 그의 작품에 대해 “애매성의 매혹”(이광호), “서정적 서사시의 개척자”(박덕규), “미학주의와 허무주의의 찬란한 융합”(이숭원), “사랑을 가장 수준있게 다루는 시인”(이혜원), "서정성을 온전한 장르적 장치로 활용해낸 성공적인 한 사례"(이강진) 등등의 여러 문학적 평가가 있다. 본 '엉거주춤' 시에서도 그와 같은 황 시인의 어법이 두드러진다.
황 시인은 문음사, 미학사 등에서 편집 주간을 지냈고, 국제기아대책기구, 선교 단체인 국제사랑의 봉사단 일원으로 인도,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 구호 및 봉사활동을 했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인디언보호구역 청소년 사역이나 토론토CBS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했다. 귀국 후 2003년부터는 아프리카를 돕는 NGO 사역에 집중한다. 사진작가 김중만과도 교류하며 아프리카의 에이즈 고아와 어린이 에이즈 환자들을 돕는 봉사 활동을 시작으로 점점 교육, 예술, 의료 지원 및 여성 할례 반대 운동 등으로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때 탄자니아 문인들을 위해 탄자니아작가협회와 함께 아프리카 고유어인 스와힐리어 문예지 '라피키 와 파시히(RAFIKI WA FASIHI)'를 창간했으며, 2011년 피스프렌드 아프리카 본부가 자립하자 20년 동안의 아프리카 활동에서 은퇴했다. 참으로 다양한 사역과 문학적 유랑이 아닐 수 없다.
이후 화가 정인희(1986-2023) 화백과의 제주 생활이 황 시인에게는 아마 평범하고도 행복한 기간이 아니었을까? 황 시인은 그 기록으로 『 다 인연이우다게』(2024년, <주>난다)를 펴냈다. 이 책에서 황 시인은 꽃을 좋아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떠돌아 사는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늘 '너 때문에 내가 다른 기도를 못한다'하셨던 그 지극한 어머니 사랑(모순적 은혜)를 떠올린다.
필자가 한때 몸담았던 창조과학회는 태동기 CCC안에 얹혀 살고 있었다.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선교 열정으로 가득찼던 고 김준곤 목사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이때 여러 CCC간사들과 필자는 한몸이었다. 특별히 방송 선교 팀들(뜨거웠던 허앙, 박영수, 남수 교수, 류호상 목사 등등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하지만 필자는 이때 이 귀한 CCC출신 황 시인에 대한 한 가지 강렬한 기억이 남아있다. 40년 전 황학주 시인의 명함에 적혀 있던 "말 방울까지도 정결케 하시는 능력의 주님을 의지하며"(참조, 슥 14:20)가 잊혀지지 않는다. 명함에는 자신의 이름과 오직 이 성경 말씀만 적혀 있었다. 아마 황 시인은 기억도 못할지도 모르겠다. 이 명함의 구절이 아마 황 시인의 당시의 진심을 대변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황 시인은 서울여자대학교 국문학과 겸임교수로 시를 가르쳤고, 황성주 박사의 <이롬> 고문도 지냈다. 황 시인의 제주의 삶이 여전히 복 되길.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신학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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