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아치 케네디의 기고글인 ‘이것이야말로 진보적 기독교가 지닌 가장 큰 위험이다’(This is the real danger of Progressive Christianity)를 1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아치 케네디는 신앙과 문화의 교차점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 평론가이자 블로거, 연사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베일러대학교가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활동과 LGBTQ 이니셔티브와 연결된 165만 달러 규모의 LGBTQ+ 보조금을 반환하자, 기독교계 전반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겉으로 보기에는 믿는 자들의 압박 앞에서 한 기독교 기관이 물러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앨리 베스 스터키(Allie Beth Stuckey) 등 여러 사람이 지적했듯, 이는 영적 확신에서 비롯된 승리가 아니었다. 계산된 후퇴였으며, 단순한 한 건의 보조금 문제를 넘어 훨씬 더 깊은 문제를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진보적 기독교(Progressive Christianity) 라는 점점 커져가는 위험이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신학적 변화가 아니다. 영적 위조품이다. 기독교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성경의 권위를 버리고 세상의 인정을 선택한다. 진보적 기독교는 내부에서 속인다.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을 부인한다(디모데후서 3:5). 결국 사람들의 구원을 위협한다.
진보적 기독교란 무엇인가?
진보적 기독교는 단순히 “마음이 열린” 버전의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신앙을 완전히 재정의하는 것이다. 진보적 신학은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거부하고, 죄를 인간 경험의 렌즈로 재해석하며, 거룩과 회개보다 사랑과 포용을 강조한다. 또한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 관점에서 진리는 유동적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협상 가능하다. 예수는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부르시는 구주(누가복음 9:23)가 아니라 도덕 교사 정도로 축소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속임수다.
왜 진보적 기독교가 무신론보다 더 위험한가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필자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무신론자는 불신을 숨기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은 명확하다. 그러나 진보적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언어, 성경 구절, 감정을 사용해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가르침을 정당화한다. 죄를 재정의하고, 성경이 회개하라 명하는 삶의 방식을 긍정하며, 구원을 막연한 자기 사랑의 메시지로 축소한다.
그 결과 사람들을 영적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길로 인도하지만, 결국 그리스도와 분리된 길에 서게 한다. 예수께서는 이런 속임수에 대해 경고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복음 7:15). 진보적 기독교는 이 ‘양의 옷’을 잘 걸친다. 그러나 사람들을 구원 없는 길로 이끈다.
베일러 사태는 증상일 뿐이다
베일러대학교의 보조금 논란은 더 큰 패턴 속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미국의 여러 기독교 기관이 신앙의 외형은 유지하면서 점점 세상 문화에 동화되고 있다. 많은 교회와 대학은 순종의 대가 없는 ‘기독교 브랜드’만 원한다.
드라마 <더 초즌(The Chosen)>이 죄를 긍정하는 집단과 손잡거나, 일부 신학교들이 신학적 기준을 은밀히 바꾸는 것 모두 같은 타협의 일환이다. 이는 특정 사안만의 문제가 아니다. 성적 지향, 성별, 결혼, 낙태, 복음의 유일성 등 이 운동은 문화에 맞추어 신앙을 재조정한다. 그러나 성경적 신앙은 문화를 회개로 부르고 그리스도를 따르라 명한다.
연민과 확신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고백하자면, 필자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여기면서도 동시에 동성애자로 정체화하는 친구들이 많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이들도 있다. 그들은 예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최소한 자신들은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사랑스럽고 독점적 관계”라면 하나님이 동성 간 관계도 긍정하신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왔다.
필자도 과거에 그와 같은 생각을 했다.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았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우리의 진정성은 구원이 되지 않는다. 오직 예수께서 구원이 되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 머무르도록 두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와 거룩, 변화로 부르시는 분이다. 그것은 잔인함이 아니라 은혜다.
그래서 필자는 여전히 이 문제로 씨름하는 이들을 향한 깊은 연민을 갖고 있지만,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지 않고 현 상태에 머물게 하는 “또 다른 기독교”를 결코 긍정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진보적 기독교이며, 그래서 위험하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참된 기독교는 편안하지 않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태복음 7:13). 진보적 기독교의 길은 넓다. 매력적이다. 긍정적이다. 그러나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그분의 기준은 문화에 따라 진화하지 않는다. 회개와 믿음, 순종으로의 부르심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그보다 적은 것은 결코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결과를 초래하는 거짓말이다.
용기를 향한 부르심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보며 낙담하는 성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 자를 보존하신다. 그러나 이제 깨어나야 한다. 동의가 곧 사랑이 아니고, 침묵이 곧 평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참된 사랑은 진리를 말한다. 참된 평화는 문화적 인정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다.
진보적 기독교의 위험은 평화 없는 곳에 평화를 말한다는 것이다. 회개 없는 위로, 변화 없는 긍정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담대하고 분명하며 동시에 긍휼히 여기며 이 사실을 말해야 한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